무거운 쪽서 가벼운 쪽으로 기울다
-건설·해운업 25년만에 미래 걱정
-15년전 매출 18兆 삼성, 작년 電子만 165兆
-현대차도 글로벌 톱5로 급성장
-한 때 매출액 4위 대우는 공중분해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1988년 서울 올림픽, 1998년 IMF 사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12년...
24년 전 열린 서울 올림픽은 한국 경제를 한 계단 끌어올렸다. 개발도상국가 경제의 기틀인 중산층이 형성됐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경제 규모도 급속도로 팽창했다. 화학·중공업 등에 집중됐던 산업 구조도 점차 반도체·컴퓨터 등 첨단 산업으로 다양해졌다.
과거 5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 속도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빨랐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이 됐다. 한국 대표 기업들이 몸집을 키우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다.
1988년 이후 10년 동안 한국의 기업들은 소위 르네상스를 맞았지만 큰 고비를 넘어야 했다. 호재였든 악재였든 변화가 불가피했고 체질을 개선하면서 외부 환경에 맞서야 했다. 수많은 기업이 1997년 말 IMF 사태를 맞고 해외자본에 팔리거나 몸집을 줄였다.
부침 끝에 한국 기업들은 괄목할 만한 양적·질적 성장을 이뤄냈다.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기업도 있었지만 삼성그룹·현대자동차그룹·LG그룹 등 다수 대기업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변방의 작은 국가에서 국내용 전자 제품을 만들어 파는 데 주력했던 삼성전자는 현재 반도체 생산 세계 1위일 뿐 아니라 굴지의 핸드폰 제조 업체 모토로라와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1998년 삼성그룹 전체 매출액은 18조3560억원에 불과했지만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전자의 매출액만 165조원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차 역시 초유의 IMF 파고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딛고 글로벌 톱5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싸고 조악한 차를 만드는 회사로 취급 받던 해외 시장에서 이제는 성능에다 디자인까지 호평을 받으며 '올해의 차'로 선정되는 등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했다.
◆화려한 성장의 이면(裏面)=한국 기업에 영화(榮華)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8년 전환점을 맞이해 1990년대 후반까지 그룹 매출액 순위 4위에 올랐던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재계의 신화로 추앙 받았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장기간의 해외 도피 후 귀국해 옥고를 치른 뒤 해외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풍문만 나돌 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1988년 재계 순위는 삼성, 현대, 럭키금성, 대우, 선경, 쌍용, 한진, 기아, 롯데, 한국화약 순이었다.
2009년 말 기준으로는 삼성, SK, 현대차, LG, GS, 포스코, 롯데, 현대중공업, 한화, 금호아시아나 순인 점과 비교해 보면 기업 순위가 상당수 바뀌었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2005년 이후 재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던 금호아시아나그룹 역시 주력 사업의 부진에 이어 오너 일가의 경영권 다툼으로 2010년 이후부터 재계 순위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주목할 점은 주력 사업이 건설업·해운업이었던 그룹은 대거 재계 순위에서 밀려났다는 점이다. 1988년 이전 재계 순위 10위 안에 대림·한진그룹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나 2012년 현재 10위권에서 이들 그룹의 사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한국의 주력 산업군이 변해 왔기 때문이다. IMF 사태 이전까지는 중화학공업이 성장을 이끌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정보기술(IT)을 중심으로 한 산업군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는 연간 매출액 추이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삼성그룹이 처음으로 그룹 매출액 10조원을 기록한 1986년 이후 100조원을 넘어서기까지 만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반면 200조원까지는 만 9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LG그룹도 과거 럭키금성 시절보다 휴대폰 사업이 호황을 이뤘던 2000년 이후 약 1.4배 이상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왔다. 이들 두 그룹의 공통점은 주력이 IT였다는 점이다.
그룹이 분리된 이후 현대그룹의 몰락과 현대차그룹의 번영 역시 IT산업군의 성장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자동차가 엔진과 파워트레인의 성능으로만 평가 받던 과거와 달리 1998년 이후 불어온 IT 붐은 자동차의 평가 기준을 바꿨다.
현대차는 엔진과 변속기 등의 성능 향상은 물론 IT와 자동차를 효과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편의사양 등에서는 글로벌 브랜드보다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현대그룹은 건설시장의 침체와 대북 사업의 잇단 실패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지 못하고 경영권 방어를 고민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지난해 4월에는 주력 계열사인 현대건설마저 현대차그룹에 넘겨야 했다.
◆호재와 악재의 변증법=한국 산업계에 대표적인 '성장 코드'로 남아 있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10년을 주기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호재는 호재대로, 악재는 악재대로 자양분이 됐다.
해외 기업분석가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이후 한국 기업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선진국으로 분류됐던 미국, 일본, 유럽 국가의 기업과 비교해 체급은 물론 체질이 눈에 띄게 좋아져서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 결과다.
한 번의 호재에 이은 두 번의 큰 충격이 몇몇 기업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글로벌 넘버원을 외쳤던 대우그룹은 IMF 사태로 간판을 내렸고, 금호아시아나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은 오너 일가의 갈등으로 인수했던 대우건설을 파는 등 위태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올해 들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이 새롭게 '위기론'을 설파하고 있다.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주의'로 풀이된다. 변화의 요구는 시기를 가리지 않는다. 먼저 준비하면 호재든 악재든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다. 올림픽, IMF,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던 지난 24년처럼 말이다.
임철영 기자 cy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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