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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탁구 만리장성, 빈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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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2012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2일 막을 내렸다. 한국은 남자 단체전 결승 문턱에서 중국에 0-3으로 패해 3위를 차지했다. 덩달아 준결승에 오른 여자 선수들도 싱가포르에 2-3으로 져 3위를 기록했다. 이는 국제탁구연맹(ITTF) 랭킹과 비슷한 결과다. 지난 2월 남자와 여자 선수들은 각각 3위(262점)와 5위(216점)를 달렸다. 최근 발표된 3월 랭킹에서 남자는 독일(262점)을 제치고 중국(266점)에 이어 2위(264점)를 차지했다. 여자는 2점이 더 해진 218점을 얻었지만 5위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1위를 질주하는 중국은 266점으로 자리를 수성했다.


중국의 저력은 이번 대회에서도 막강했다. ITTF 남자 랭킹 1위의 마룽을 비롯해 장지커(2위), 왕하오(3위), 수신(4위), 마린(7위) 등이 나선 단체전에서 독일을 3-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딩링(1위), 류시원(2위), 구오얀(3위), 리샤오시아(4위), 구오유에(7위) 등을 내세운 여자도 싱가포르를 3-0으로 가볍게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중국 남자는 24강이 4개조로 나눠 치른 조별 리그 A조에서부터 선전을 예견했다. 북한, 스웨덴, 홍콩 등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춘 다섯 나라들을 모두 3-0으로 격파, 8강에 직행했다. 이후 열린 녹아웃 스테이지에서도 오스트리아, 한국, 독일 등을 상대로 단 한 게임도 빼앗기지 않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여자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상 중국 국내 경기인 홍콩과의 준결승에서 한 게임을 내줬을 뿐, 나머지 7경기를 모두 3-0 승리로 장식했다.


중국의 세계선수권 독주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상하이대회를 시작으로 지난해 로테르담대회까지 5대회 연속 남녀 단식, 남녀 복식, 혼합복식 등 전 종목 우승을 휩쓸었다. 개인전 대회가 분리되어 열리기 시작한 2001년 오사카 대회 이후 중국 국적이 아닌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 건 2003년 파리 대회 남자 단식의 베르너 슐라거(오스트리아)가 유일하다.

중국 탁구가 세계무대에서 위세를 떨친 건 1971년 나고야대회부터다. 이후 중국 아닌 나라의 선수가 우승한 사례는 손에 꼽힌다. 1971년 대회 남자 단식의 스텔란 뱅트손(스웨덴), 1975년 캘커타 대회와 1977년 버밍엄 대회 여자 단식의 박영순(북한), 1979년 평양 대회 남자 단식의 오노 세이지(일본), 1987년 뉴델리 대회 여자 복식의 양영자-현정화, 1989년 도르트문트 대회 혼합복식의 유남규-현정화(이상 한국), 1991년 지바 대회와 1997년 맨체스터 대회 남자 단식의 얀 오베 발트너(스웨덴), 1993년 예테보리 대회 남자 단식의 장 필립 가티엥(프랑스)과 여자 단식의 현정화 정도가 여기에 포함된다.



단체전의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1년 나고야 대회 이후 중국이 아닌 나라가 우승한 사례는 1973년 사라예보 대회 여자부의 한국, 1979년 평양 대회 남자부의 헝가리, 1989년 도르트문트 대회부터 3연속 우승을 차지한 남자부의 스웨덴, 1991년 지바 대회 여자부의 남북 단일 코리아, 2000년 쿠알라룸푸르 대회 남자부의 스웨덴, 2010년 모스크바 대회 여자부의 싱가포르 정도다.


이번 대회 여자부 준결승에서 한국을 3-2로 이긴 싱가포르는 나라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중국 2진에 가깝다. 국내 팬들에게 이름이 꽤 알려진 리자웨이(ITTF 랭킹 15위), 왕예구(8위)를 비롯해 펑티안웨이(5위), 순베이베이(21위) 등은 모두 중국 출신이다.
중국 탁구의 강세는 7월 27일 개막하는 2012 런던하계올림픽에서도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가 사실상 그 전초전이었던 까닭이다. 올림픽에서는 남녀 단식과 남녀 단체전이 열리는데 한국은 이번 대회에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주세혁, 오상은, 김경아, 박미영 등 ITTF 상위 랭커들을 모두 출전시켰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경험이 런던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1926년 출발해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1999년 맨체스터 대회를 끝으로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분리됐다. 이후 홀수 해에는 개인전, 짝수 해에는 단체전을 치르고 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함께 치를 때는 대회 기간이 올림픽 기간에 버금갈 만큼 길었다.


출전국도 많다. 국내에는 한국 성적 위주로 보도돼 대회 규모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대회의 경우 남자부는 경기력 수준에 따라 5개 리그에 120개국, 여자부는 4개 리그에 93개국이 참가했다. 남자 5부 리그에서는 스리랑카, 자메이카, 우간다, 토고 등 24개 나라, 여자부 4부 리그에서는 타지키스탄, 탄자니아, 코소보 등 20개 나라들이 서로 기량을 겨뤘다. 이들의 경기 수준은 우리나라 중학교 정도 수준에 가깝다.


아무튼 탁구는 다른 어느 종목 세계선수권대회보다도 그 규모가 크다. 그래서 어지간한 장소가 마련되지 않으면 대회를 소화하기 어렵다. 한국은 올림픽을 소화하고 양궁과 유도, 역도 등 여러 종목의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렀지만 아직까지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탁구하면 떠오르는 단상이 있다.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금메달을 획득한 건 1987년 뉴델리 대회였다. 당시 대회 장소는 인디라 간디 체육관이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개인전을 치를 때 40개 정도의 탁구대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 매우 넓은 실내 공간이 필요하다. 인디라 간디 체육관의 규모도 꽤 컸다. 체육관 안에 새가 날아다니다가 ‘실례’를 한 게 탁구대 위에 떨어져 경기가 여러 차례 중단되었을 정도다.


그런 규모의 체육관에서 종목별 결승이 벌어질 때는 단 하나의 탁구대만 놓인다. 당시 여자 복식 결승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다이리리-리후이펀 조와 진검승부를 벌였다. 2만여 관중의 눈동자가 한곳에 쏠렸다. 양영자는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지만 현정화는 단발머리를 한 어여쁜 여고생에 불과했다. 어지간한 선수 같으면 다리가 후들거릴 만했던 무대. 하지만 현정화는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주먹을 불끈 쥐고 특유의 목소리로 연신 ‘파이팅’을 외치며 경기의 분위기를 한국 쪽으로 이끌었다. 조용한 양영자와 투지 넘치는 현정화는 1시간여의 접전 끝에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1년 뒤인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 금메달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중국은 다이리리-리후이펀 조가 한국에 무너진 뒤 많은 선수들로 여러 조를 짜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서울하계올림픽에서도 그러했다. 왼손 셰이크핸드 드라이브 전형의 자오즈민과 천징을 함께 묶는 변칙적인 조를 만들었지만 양영자-현정화 조의 벽을 넘지 못했다. 오른손 펜홀드 드라이브 전형인 양영자와 오른손 펜홀드 전진속공형인 현정화의 만남은 한국 탁구에 큰 기쁨이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한국 여자 선수 가운데 당예서와 석하정은 중국 출신 귀화 선수다. 엄밀히 따지면 한국도 중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선수권대회 3위의 성적을 올린 것이다. 이에리사, 정현숙, 양영자, 현정화가 세계무대를 호령했던 그 시절의 영광은 언제쯤 재현될 수 있을까. 아직 중국의 벽은 너무 높아 보인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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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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