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연극 '푸르른 날에'(4월 21일부터,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가 돌아온다. 차범석 희곡상 3회 수상작으로 지난해 5월 초연된 '푸르른 날에'는 2011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연출상 수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 주요 연극상을 두루 흽쓴 화제작이다.
'푸르른 날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속에서 꽃핀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의 인생을 구도(求道)와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녹여낸 정경진 작가의 작품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출연 배우 19명의 놀라운 앙상블은 '푸르른 날에'의 최고 미덕 중 하나다. 여산 역의 김학선과 나이든 정혜 역의 정재은, 일정 역의 이영석, 오민호 역의 이명행 등 초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고스란히 이번 재공연에 합류했다.
'푸르른 날에'의 내러티브는 일견(一見) 영화 느낌이다. 차 밭이 보이는 고즈넉한 암자에서 수행 중이던 승려 여산은 자신의 조카인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고 30여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혈기왕성한 야학 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민호라는 속세 이름으로 전통찻집에서 일하던 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던 '푸르른' 시절. 때 마침 광주 민주화운동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민호와 정혜는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시민군의 신분으로 사수하던 도청을 빠져 나와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 신세가 된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정신 이상을 겪은 후 불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여겼다. 3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민호 아니 여산은 깨닫는다.
고선웅(45, '성인용 황금박쥐' '이발사 박봉구') 연출가는 '푸르른 날에'를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으로 정의한다. 그의 말대로다. '푸르른 날에'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피어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다. 인생의 '가장 푸르른 날'을 역사적인 비극에 빼앗긴 사람들이 잃어버린 푸르른 날을 그리워할 수도, 노래할 수도 없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철저히 희극적이며 통속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과거 정혜와 민호의 첫 만남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여산은 "아, 저기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구나...비록 지금은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하던 사이!"라는 '맛깔' 나는 대사를 내뱉는다. 어둡고 무거운 서사와 통속 멜로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역으로 이용해 과장되고 희극적인 연극 어법을 취하고 있는 것. 영리한 접근 방식이다. 과거 5.18을 다룬 작품들이 역사 현장을 재연하는 사실주의 극의 틀로 반성과 감동을 준 것과는 달리 '푸르른 날에'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내러티브에 역설과 위트 양념을 더해 5.18을 지난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 역사로 탈바꿈시킨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서정주 시, 송창식 노래로 여는 마지막 장면은 '푸르른 날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이라이트다. 개인과 역사의 비극을 넘어 그 아픔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더 푸르른 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펼쳐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암시다. 의도는 명백하다. '푸르른 날에'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이 현재를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인 감상(感傷)을 통해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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