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한국수력원자력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전력공급 중단사건을 둘러싸고 조직적 은폐를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수원은 원전 전력공급 중단사건 이후 실시한 비상디젤발전기 자체 점검에서도 이상 발생 여부를 고의적으로 누락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21일 브리핑을 갖고 고리 1호기 전력공급 중단사건 조사 현황을 발표했다. 안전위는 13일부터 현장에 조사단을 파견해 사건 발생 원인과 보고 지연 경위, 기술적 사항 등을 조사해왔다.
안전위에 따르면 9일 정전사건 당시 1호기는 3개 외부전원 회선 중 1,2번 회선과 2대 비상디젤발전기 중 1대인 '비상디젤발전기A'를 정비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작업자가 절차서에 따르지 않고 3번 회선 보호계전기 시험을 하던 중 회선이 차단되면서 외부전원이 끊겼고, 2대 중 나머지 1대인 '비상디젤발전기B'가 자동 기동에 실패했다. 고리원전측은 12분만에 정비중이던 외부전원 1번을 연결해 전력 공급을 재개했다.
브리핑에 참석한 박윤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장은 "해당 시험은 원래 사전 작업계획에 따라 11일로 예정돼 있던 것"이라며 "한수원측 감독관이 절차서를 무시하고 시험을 임의로 앞당기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정비 절차의 모든 공정은 한수원에서 관리한다"며 "정비절차를 바꾸면 한수원 정비팀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됐다"고 덧붙였다.
사건 당시 문병위 전(前) 고리원전본부 제1발전소장은 사건 발생 약 8분 후인 오후 8시 42분경 주제어실을 방문해 사건 발생을 확인했다. 8시 46분 전원 복구 이후 발전소장은 사건 현장에 있던 주요 간부들과 논의해 한수원 상부와 안전위에 보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고리원전본부는 사건 당시 근무한 발전팀의 모든 운전원 일지에 발전소 정전 사건 발생과 복구 일시 기록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비상디젤발전기 기동실패 관련 사항에 대해서도 시험관리대장 기록을 삭제했다.
한수원측은 10일 계획된 일정대로 비상발전기 2대가 모두 운전 불가능한 상황에서 핵연료 인출 등 정비를 계속 추진했다. 고리1호기 운영기술지침서에 따르면 핵연료를 인출할 땐 최소 1개 외부전원과 1대의 비상디젤발전기가 운전가능한 상태여야 한다. 유국희 안전위 안전정책국장은 "비상발전기 기동 문제를 은폐하기로 한 상황에서 추후 정기점검 일정을 강행한 것"이라며 "안전수칙상 규정 위반으로 행정처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디젤발전기 자동 기동실패를 둘러싼 한수원의 조직적 은폐는 2월 26일에도 발생했다. 한수원은 21일 정기검사에 대비해 사고 원인이 됐던 '비상디젤발전기 B'를 자체적으로 분해, 정비를 실시했다. 21일부터 23일까지 KINS 입회하에 실시된 정기검사에서는 아무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26일 한수원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외부전원 절체시험에서는 또 자동 기동이 되지 않았다. 박 원장은 "전원 절체시험을 할 땐 담당 검사원이 항목별로 시험절차를 하나씩 확인하고 서명해야 한다"며 "비상디젤발전기가 돌지 않을 때 정지를 요청해야 한다는 부분에도 이상이 없다고 사인이 돼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한수원측에서)오전과 오후 2차례의 시험 모두 서류상 문제가 없는 것으로 써 놨다"며 "또 다른 은폐"라고 덧붙였다.
한편 고리원전본부장과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은 이번 사건을 10일 처음 안 것으로 확인됐다. 유 국장은 "신임 고리본부장이 10일 오후 1시경 본사 발전본부장에게 대면보고했으며, 같은 날 오후 5시 40분경 사장에게 전화로 한 달 전 정전사고가 있었다고 구두보고했다"고 확인했다.
안전위측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원자력 안전감시 시스템을 강화할 방침이다. 원잔 부지 현장에서 안전규제를 담당하는 주재관 제도를 지역사무소 형태로 운영하고 근무인력도 현재 부지당 5명에서 25명으로 늘린다. 또한 한수원의 안전문화수준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IAEA에 안전문화평가(SCART)를 의뢰하기로 했다.
한수원 측에도 사업자 차원의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한편 사건 원인이 됐던 고리 1호기의 비상디젤발전기 공기공급밸브를 일단 1개에서 2개로 늘리는 조치를 취한다. 내년 3월에는 비상디젤발전기를 새 것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유 국장은 "현재 서류와 현장 점검, 인터뷰로 이뤄지는 검사 체제에서는 사업자가 조직적 은폐를 시도하면 밝혀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원전 이상 발생을 24시간 자동으로 통보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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