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포스코 내에서 생산 기술 계통을 밟아온 정통파 엔지니어 출신이다.
1975년 포스코 공채 7기로 입사해 제강기술 과장, 제강 부장, 생산기술 부장, 기술연구소 부장 등을 두루 거치며 생산 현장에서 직접 기술 개발을 주도해 포스코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했다.
1999년 유럽연합(EU) 사무소 부장과 상무를 역임하며 해외 사업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한다. 이 때의 교훈이 훗날 ‘글로벌 포스코’라는 전략을 세우는데 기반이 됐다.
현장에서만 주로 일해온 탓에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EU사무소장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본격적인 승진가도를 달리게 된다. 2003년 광양제철소 선강담당 부소장에 이어 1년 후 전무 승진과 함께 광양제철소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생산기술부문장 겸 대표이사 부사장, 2007년에는 대표이사 사장으로 직함을 바꾸며 최고경영자 후보의 반열에 까지 오르게 된다.
광양제철소장 시절에는 포스코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고급 자동차강판 국산화를 주도했다. 고급 자동차강판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최신예 설비 신증설과 조업기술 개발을 이끌어 광양제철소를 자동차강판 연간 650만t 생산체제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여기에 엔지니어의 노하우를 살려 포스코의 독창적인 자원 재활용 방법(POS-LEAD기술 등)을 개발해냈으며, 친환경 신기술인 파이넥스(FINEX) 공법의 상용화를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5월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2008년 포스코건설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곧바로 이구택 회장의 사임 발표후 진행된 차기 회장 경쟁에서 공채 기수에서는 한 기수 위지만 나이는 동기인 윤석만 사장과의 경쟁 끝에 승리해 2009년 2월 포스코 회장에 취임했다.
정 회장의 지난 3년은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포스코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감산에 돌입했다. 전 세계 철강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수시장에서는 현대제철이 고로 가동을 시작하며 고로의 경쟁체제를 확립했고, 동국제강 등 후발 경쟁사들도 대대적으로 생산 설비를 늘려 포스코의 시장 지배력을 잠식해 나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 회장은 상시적 위기경영체제를 돌입해 분 단위의 뼈를 깎는 원가절감을 이뤄냈고, ‘스마트경영’, ‘포스코 3.0’이라 불리는 업무 구조 및 마케팅 혁신을 단행해 고객 이탈을 막아냈다. 이를 통해 포스코는 강력한 경쟁체제에서도 분기별 두자리수 영업이익률 및 분기 영업익 1조원선을 유지해 나가며 세계 최고의 철강사로 다시 올라섰다.
또한 대우인터내셔널과 태국 타이녹스 등을 인수하고,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진출하는 등 비철강 부문 신성장 사업 확대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더불어 지속적인 사회공헌 및 상생협력 활동을 통해 포스코를 신뢰 있는 기업으로 자리매김 시킨 것 또한 정 회장이 이뤄낸 큰 업적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리더십을 인정해 CEO추천위원회는 현 상황의 포스코를 이끌어 나갈 회장 후보는 정 회장이 가장 적임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1948년 2월3일생이며 경기도 수원이 고향이다. 서울사대부고와 서울대 공업교육과를 졸업했다. 바쁜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자, 이공계 출신이면서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해 6월에는 공학한림원 회장에 선임됐다.
또한 10여 년 전 노사문제로 회사를 떠난 직원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명 한 명 살피는 자상함과 함께, 회장 선임 후 매주 임직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애로점을 해결해주는 배려심 강한 CEO이기도 하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에도 능통해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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