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석유화학 공단 전체에 전력을 독점 공급하는 곳이 한전 뿐인데 맞서 봐야 얻는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한전은 우리에게 '슈퍼 갑(甲)'인데요."
지난 6일 갑작스런 정전 사고로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피해를 입은 울산의 한 석유화학기업 임원의 하소연이다.
이날 정전으로 1년 365일 휴일도 없이 가동돼야 하는 정유공장은 무려 14분이나 멈췄다. 그나마 2주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피해복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주고 있다.
한국전력은 이번 정전이 변전소의 설비고장 때문이라고 밝혔다. 송전설비 증설작업 도중 정전발생 5일전 추가된 가스절연개폐장치 이상이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사전정비가 부족했거나 제품의 하자라고 해도 미리 이를 발견하지 못한 관리감독 부실이다. 결국 울산 정전은 시험 가동 중에 발생한 인재라는 점에서 한전은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한전이 느껴야할 질책보다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정전으로 발생한 공장의 피해다. 한전 측은 SK에너지 울산공장을 포함해 효성, KP케미칼, 한주 등 울산공단 내 기업 5곳의 피해액이 200여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의 얘기는 다르다. 정전으로 인해 생산하지 못해 폐기한 원료, 정상가동을 위해 투입돼야했던 노동력과 자금, 원료 폐기로 발생한 환경문제 등을 고려하면 액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나머지 중소업체 60여개사에서 발생한 피해는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하다.
특히 정전 피해 보상은 기업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정전의 책임은 한전에 있다고 해도 정전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해주는 경우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 발생한 여수 국가산업단지 정전사고로 GS칼텍스, LG화학 등 26개 업체가 피해를 입었지만 보상을 받지 못했다.
사고 발생 10개월이 지났지만 보상 여부는 여전히 협의 중이다. 정유사 관계자에게 소송 가능성을 묻자 "일부 기업들은 한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보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한다"고 대답했다. 대응해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크다는 설명이다.
올해 우리나라 정유ㆍ석유화학 기업들은 사상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자동차, 반도체 못지않은 수출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더 뻗어나갈 수 있도록 적극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막대한 영업 손실을 나몰라라 외면하는 '슈퍼갑'에 대한 시선이 영 미덥지 못한 이유다.
오현길 기자 ohk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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