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이상미 기자, 박은희 기자] "돈을 줬다는 사실 자체를 시인했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의도가 어떠했든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곽노현 교육감의 행실은 핑계의 여지가 없지만, 곽 교육감이 추진하던 정책이나 가치까지 싸잡아 저평가되는 건 문제다."
진보 성향인 곽노현 교육감의 '뒷돈 거래 의혹' 수사를 지켜보는 교육계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법률적 판단을 떠나 도덕적으로 명백한 잘못이고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곽 교육감이 진행하던 정책이나 그 방향성까지 매장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구책 마련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이런 분위기는 서울시 교육행정 일선에서부터 감지된다. 서울의 한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교육계는 진보와 보수가 비교적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어 성향별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가 있는데, 지금은 진보와 보수 나눌 것 없이 곽 교육감의 과실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특히 학교 현장에서는 전교조 출신 교원들의 자조섞인 반응마저 감지되고 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는 "최근 만난 전교조 소속 서울의 초ㆍ중등 교사들 중에서는 '이러니 전교조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는 개탄스러운 목소리도 나온다"고 했다.
그는 또 "곽 교육감이 추진 중인 무상급식, 체벌금지, 시험경감 등의 정책은 색깔이 워낙 뚜렷해서 학생들도 '곽 교육감의 정책', '진보 교육감의 정책'으로 인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사태로 학생들이 곽 교육감의 정책적 방향이나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진보성향의 교사들에게서 나오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곽 교육감이 1일자로 단행된 시교육청 인사 대상자들에게 직접 임명장을 건넨 것을 다소 거북해하는 반응마저 현장에서 감지된다는 게 이 관계자의 또다른 전언이다.
전교조 소속의 서울지역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일선 교사들은 분노나 비판적 감정 뿐만 아니라 실망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면서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곽 교육감의 잘못은 큰 문제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가치만은 지켜나가야 한다'는 경각심이 엿보인다. 진보개혁 진영의 단일 후보로서 곽 교육감이 가졌던 의미, 그를 추대한 190여개 진보 시민단체의 구상이 퇴색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의 한 진보인사는 "곽 교육감이 2억원을 건넨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가 이뤄가려던 가치와 정책은 이번 사태와 다른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조국 교수도 지난달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진보개혁 진영은 큰 정치적ㆍ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표적수사를 비판하기 전에 내부를 돌봐야 한다"는 말로 현실인정과 함께 냉정한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김명신 서울시 의원(민주당)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번 사태의 사실관계는 당사자들과 법원의 문제"라고 지적한 뒤 "지난 1년 동안 서울시교육청이 보여준 가치와 이념은 과거 교육감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서울교육을 변화시켰다. 죄를 저질렀다면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지향하는 가치만은 이번 사태와 무관하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말로 곽 교육감 사태를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 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때 후보 단일화를 주도했던 교육 및 시민사회 단체들은 지난달 30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에 보다 신중하고 투명한 수사를 요구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며 "검찰은 한 점 의혹도 없이 철저하게 수사하고,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이고도 명백하게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2억원을 건넨 점에 대해 "공직자이자 교육자로서 적절치 못했고 유감이다"라면서도 "주변인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댓가성이 있다는 정황만 있어 이를 바탕으로 교육감 진퇴를 결정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전 의장 유초하씨는 "검찰은 자진출두한 강모 교수에 대해 '체포했다', 박 교수측의 일방적인 진술에 대해 '자백했다'라는 식의 명확하지 않은 표현을 써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어 "진보진영까지도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며 "진실이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참여연대 합동사무처장 박원섭, 민교협 전 의장이자 충북대 철학과 교수 유초하,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박석운, 교육희망네트워크 대표 김옥성,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장석웅, 민주화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김유진 씨 등 진보성향 교육ㆍ시민단체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했다.
김효진 기자 hjn2529@
이상미 기자 ysm1250@
박은희 기자 lomo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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