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들의 침묵
[아시아경제 정호창 기자]홍길동의 비애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피를 나눈 내 아버지, 형이 분명하지만 그는 노비 어미의 자식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이 있어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국내 증권가에도 이런 홍길동이 즐비하다. 바로 '증권가의 꽃'이라는 애널리스트들이다.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하지 못했다면 이들은 매도, 즉 '주식을 팔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23일 증시에서 SK C&C는 장중 9% 이상 급락했다. 코스피지수가 65포인트 넘게 오른 급등장에서 홀로 반대로 움직인 것. 원인은 외국계 증권사인 골드만삭스의 '매도' 리포트였다. 이날 오전 골드만삭스는 'SK C&C의 주가가 최근 많이 올라 프리미엄이 과도하다'며 팔라는 의견을 내놨고 시장이 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국내의 잘나가는 기업들에 대해 '매도' 의견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 상반기에도 고려아연, 동국제강 등에 대해 매도 리포트를 내놨고 그때마다 해당 기업의 주가는 크게 출렁거렸다.
투자자들이 골드만삭스의 투자 의견을 따르는 이유는 뭘까. 골드만삭스에 대한 절대적 신뢰 때문일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증권사들이 '매도' 의견을 내지 않기에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외국계 증권사들이 가끔 내는 이 특별한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 증권사 중 지난 2009년 5월 이후 현재까지 '매도' 리포트를 낸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이달 들어 코스피지수가 16% 넘게 빠지며 대형주, 우량주 구분 없이 폭락해 반토막 나는 종목이 수두룩했지만 증권사들은 유구무언이었다. 기껏 해야 낙폭이 워낙 큰 일부 종목에 대해서만 목표가를 조금 낮추고 '매수' 의견을 '중립'으로 조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주식을 손절매해 손해를 줄이라'는 조언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니 투자자들은 외국계 증권사들을 국내사보다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외국인의 놀이터'라는 조롱을 받는 국내 증시인데 투자 의견에 대한 주도권마저 외국계에 뺏기고 있는 셈이다. 이를 고치려면 애널리스트들이 용기를 내 당당하게 투자 의견을 내는 수밖에 없다. 국내 증시가 홍길동의 이상향 '율도국'이 되려면 이들의 '호부호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호창 기자 hochang@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