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를 지난 4월에 그만둔 한 연구원의 이메일이 화제다. 이 연구원은 며칠 전 자신의 블로그에 퇴직할 때 최고경영자(CEO)인 구본준 부회장에게 보낸 이메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간단치 않다. 말뿐인 혁신, 토론 부재 등 LG전자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조목조목 꼬집고 있다.
"혁신을 하는 회사가 아니라 혁신을 하겠다고 '주장'만 하는 회사처럼 보인다." "프로젝트 초기에 투자수익률(ROI)부터 계산한다." "경쟁사, 특히 삼성이 어떻게 한다고 하면 비판적인 토론 없이 결정이 나버린다." "'CEO 등의 코멘트가 있었다'고 하면 이유에 대해서는 논의가 없고 바로 그 코멘트에 맞게 의사결정이 난다." 아프기 짝이 없는 날 선 비판이다.
반응은 엇갈린다. '아이디어라고 무조건 투자해야 하느냐. ROI 검토는 당연한 것 아닌가' '애정 어린 비판이라고 하기엔 너무 악의적이다' 등등 비난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 회사도 그렇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등 공감하는 내용이 주류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무얼까. 성과주의에 매몰된 대기업의 경직된 조직문화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펼치기 어려운 하향식 수직구조를 정곡으로 찌른 때문일 것이다. LG전자가 스마트폰 경쟁에서 뒤처진 '현실'도 연구원의 비판에 힘이 실리는 요인인 듯하다.
LG전자가 지난 2007년 현 구글의 수석 부사장인 앤디 루빈이 제안한 세계 첫 안드로이드폰 제작을 거절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연유 때문이지 싶다. 경직된 조직구조에서 누가 선뜻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새로운 도전에 나서자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안드로이드폰은 시장성이 검증되지 않은 단계였으니 더욱 그렇다.
삼성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 역시, 회사 측은 부인하지만 2004년 루빈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공급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때 담당 본부장이 했다는 말, "당신 회사는 8명이 일하는군. 우리는 2000명을 투입하고 있는데…." 정보기술(IT)은 수로 결판나는 게 아닌데, 막힌 사고에 갇혀 있다고 자인한 꼴이다.
삼성이 그때 루빈과 협력관계를 맺었더라면… 오늘날 삼성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안드로이드를 빌려 쓰고 있다. 1등을 빠르게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닌 시장을 창출해가는 '크리에이티브 리더(Creative Leader)'가 될 기회를 놓친 셈이다.
세계 IT 시장은 지금 요동치고 있다. 구글은 스마트폰 제조사인 모토로라 인수로 애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MS도 노키아와 힘을 합칠 것이라고 한다. 휼렛패커드는 PC 사업을 접고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를 인수하기로 했다. IT 생태계의 중심이 하드웨어 업체에서 소프트웨어 업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가 약한 삼성의 위상은 흔들리고 LG는 더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 어디 IT 분야, 삼성과 LG만 그렇겠는가. 다른 산업,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업의 미래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도전, 창의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혁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혁신의 요체는 비록 몽상(夢想)일지언정 늘 어제와는 다른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제 능력을 온전히 펼칠 수 있겠는가.
미국 그린리프센터의 CEO 래리 스피어스 박사의 CEO론. 스피어스 박사가 꼽는 CEO의 덕목은 '조직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동감을 표시하고, 그들의 잠재적 능력을 믿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경영의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얘기다. 꿈을 꾸는 것도, 꿈을 꾸게 하는 것도 다 사람의 일이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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