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서울에서 근무하는 사법경찰관 A경위. 그는 길고 험난한 검ㆍ경 수사권 논란 끝에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인정하는 형사소송법 개정 협의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에 내심 반가웠다. 그간 현행범으로 체포되거나 범죄 혐의가 뚜렷한데도 검사의 수사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던 경험과는 작별이라 생각했다. 실상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현장보존을 통해 이뤄지는 일차적인 증거수집 등 수사의 많은 부분을 이미 경찰이 도맡아 왔음에도 '독자적인 수사권한'이 명시되지 않은 법 규정이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그다. A경위는 마침 현장에서 검거된 현행범 피의자와 마주 앉아 수사를 시작했다. 막 조서를 작성하고 증거조사에 나서려는데 관할 지방검찰청 B검사에게서 "그 사건 수사 중지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A경위가 "현행범이고 본인도 혐의 인정해서 수사 막 시작했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자 "검사의 지휘에 따르도록 돼 있지 않느냐"는 B검사의 답이 돌아왔다.
20일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협의안이 통과되면서 상상해볼 수 있게 된 장면이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이날 "검ㆍ경 양 기관이 성심을 다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로 협의해온 결과 합의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까스로 협의안이 통과돼 표면적으로 경찰의 수사개시권이 명문화되긴 했지만 실질적인 수사권 배분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검ㆍ경 안팎의 지적이다.
협의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검사의 수사 지휘 범위를 다룬 형사소송법 제196조 1항은 '모든 수사'에 관해 검찰의 수사 지휘권을 명문화했다. 기존 2, 3항은 개정안의 5, 6항으로 자리만 옮겼다. 개정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정 2항은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인정하는 조항인데, 개정 3항을 통해 경찰에 의한 수사개시가 이뤄지더라도 수사에 대한 지휘권한이 검찰에 있음이 재확인됐고 개정 4항을 통해 수사의 최종 결과물이 결국 기소권을 갖는 검찰에 있음이 명문화됐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할 수는 있지만 검사가 언제든 수사를 중지시키거나 보류시킬 수 있는 셈이다. 이미 사건의 90%이상을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하고 있으며 경찰이 수사의 보조자가 아닌 주체로 인정받아야 한다던 경찰의 입장에서 크게 물러난 협의안이 도출된 셈이다.
이에 대해 서울 일선 경찰서의 한 간부는 "정부 합의니, 입법적 결단이니 오랜 수사권 조정 문제가 최종 타결된 것처럼 비춰지지만 경찰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지난 1998년 봄, 당시 새천년국민회의의 '경찰 수사권 독립 발표'이래 자치경찰제 도입 방안, 검ㆍ경 수사권 조정위원회,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등을 거쳐 10년 넘게 이어져 온 검ㆍ경 수사권 조정 논란에 대한 해답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견해다.
하태훈(형법ㆍ형사소송법)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조정안을 두고 "현실을 명문화한 것 뿐 수사권 조정 논의의 핵심을 벗어난 합의안"이라고 평했다. 경찰에 대한 '수사권의 독립과 인정범위'가 논란의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논란의 핵심을 빗겨갔다는 설명이다.
하 교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사권은 경찰에, 기소권은 검찰에 주어지는 방향이 옳다"고 전제하면서도 "당장 지금의 경찰에게 독자적인 수사권을 주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는 경찰이 현실적인 수사권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아직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이 분화되지 않은 경찰의 조직적 난제를 해결하고, '사법시험 및 연수'를 통해 상대적으로 전문성을 갖춘 검찰에 필적할만한 수사경찰 본연의 자질 개선 노력 등 "법률 문구 그대로 '사법경찰관'에 부응하는 조직과 자질, 능력을 갖추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준영 기자 fox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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