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극복하며 인류는 진화
재난 등 극복 못할 한계는 없어
우리는 지금 인류 진화의 현장 두 곳을 동시에 목도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 대 인간'의 현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대 자연'의 현장이다. 전자가 아프리카의 진주 '리비아'라면 후자는 경제대국 '일본'이다.
리비아 국민들은 용감한 선택을 했다. 선택의 목적은 숭고하기 이를 데 없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대가는 잔인하고 가혹하다. 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목숨을 잃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카다피라는 1인 독재자의 장기적 폭정이라는 후진적 정치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기 위한 리비아인의 결단은 그래서 위대한 도전이다. 일본의 자연재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한 책임을 자연이나 신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이 자연의 잘못은 아니다. 신의 노여움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없다. 인간이 오롯이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자연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일본에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어떻게 도전받고 어떻게 응전하는지를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과 도전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배자가 무서워 잠시 폭정을 참을지언정 끝내 핍박 받는 자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인간이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앞에 한 동안 몸을 움츠릴 수도 있지만 마냥 무기력하게 남아 있지도 않는다.
한 민족과 한 국가의 성숙은 수많은 시련과 성찰이 켜켜이 쌓여 이루는 퇴적층을 요구한다. 시련은 인간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자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시련이 오면 인간은 성찰한다. 시련이 너무 커서 성찰 자체가 불필요해 보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성찰과 반성을 통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인류문명은 진화해 간다.
더 나은 삶,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삶. 그것은 이 지구상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정이 사라질 때 도래한다. 더 나은 문명,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문명.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인정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 그리고 때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앙이 닥치면 서로 힘을 모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아름다운 노력을 경주할 때 이루어진다.
리비아 국민들의 자유를 향한 도전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불러왔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다국적군을 구성해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집권연장을 위해 자국의 국민들을 거리낌 없이 학살하는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돕기 위해 나섰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지만 서로 뭉쳐 자연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리비아와 일본을 돕기 위해 나선 국제사회의 연대는 인류애가 진화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 없다.
인류는 분명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를 촉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고 인간에 대한 자연의 도전이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폭정은 리비아 국민들의 자유의지를 일깨웠다. 일본의 자연재해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이 왜 자연보다 위대한지 말해 준다.
이번 리비아 민주혁명과 일본의 자연재앙은 "우리 인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뿐이다"는 토인비의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강신업 액스앤로 볍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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