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영무 부국장 겸 산업부장]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상당히 말을 아끼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길목에선 항상 작심하고 말을 뱉었다. 길게 설명식으로 늘어놓지도 않는다. 이른바 화두가 될 압축 언어만 구사한다. 그 단어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이 꼭 들어있다. 발언의 지향점은 미래다. 현실을 부정하는 '다음'을 일컫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직관력이 넘친다.
얼마 전 이 회장이 '낙제'발언을 했다. 지난 10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앞서 "정부의 경제정책 점수를 매긴다면"이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계속 성장해 왔으니까 낙제 점수는 아니겠지 않느냐. 과거 10년에 비해서는 상당한 성장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여론은 앞뒤를 자르고 오로지 낙제라는 단어에 모든 걸 집중했다. 정부와 여당이 발끈했다. 한마디로 기분나쁠 것이다. 일개 기업 총수가 정부를 평가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데 낙제 운운하니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 지구촌은 카오스(혼돈)에 빠졌다. 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에 방사능에다 전쟁까지 벌어져 온 지구촌이 경악을 하고 있다. 유가와 환율, 주가가 요동치고, 수급 불안정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제는 악재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지구촌에 재앙이 덮친 꼴이다. 도미노식 파급 효과는 감히 상상을 불허한다.
경제를 발목잡는 건 '불확실성'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이 없으면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최근 불확실성은 종횡무진으로 글로벌 경제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 말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데, 옛날 10년하고 달라서 21세기 10년은 굉장히 빠르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저도 긴장해야 하고, 임직원들도 신경 써서 더 열심히 해야 하겠죠"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 분기에만 5조원의 영업이익을 내고도 이처럼 이 회장은 '긴장'을 주문했다. 그가 내뱉은 압축 언어 '긴장'은 불과 3개월이 지나서 그대로 현실화됐다.
낙제라는 단어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을 표방했다. 미래 먹을거리였던 원전수주에도 발 벗고 나서 큰 성과를 이뤄냈다. 기업규제 완화에도 앞장섰다. 동반성장과 상생을 외치며 중기 살리기에도 적극 나섰다. '기업 프렌들리'는 MB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 회장이 이 시점에서 왜 '낙제'라는 단어를 굳이 끄집어냈을까. 이 발언 직후 곽승준 미래기획 위원장이 "대기업이 정부보다 더 관료적"이라며 재벌을 우회 비판한 것처럼 정부를 흠집내기 위해 '현상'에 대한 쓴소리를 한 것일까. 단언컨데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삼성 측이 해명했듯이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정부는 이 회장에 대한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있다. 이 회장은 1995년 베이징에서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거침없이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낙제' 발언은 '4류' 발언과 차원이 다르다. 이 회장이 재벌총수라는 무소불위(?)의 자리에서 "낙제를 면했다"며 정부를 내리깔면서 평가한 게 아니라 짧게는 MB정부의 잔여 임기 내에, 길게는 대한민국호의 순항을 위해 재계 대표(전경련회의)로서 당당히 선을 그은 것이다. '현상'만을 집착하는 시대는 지났다. 예측불능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다양한 전략을 짜야 한다. 재계 대표의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불확실성에 대비해 정부와 기업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 아직도 정부나 정치권이 기업 알기를 '감히…'라는 틀 속에 넣고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김영무 부국장 겸 산업부장 ymoo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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