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6.25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지난 대한민국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지난 60년은 굶주림의 대명사인 '보릿고개'를 극복한 자랑스러운 시기였고 패배주의를 떨치고 무역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간 팽창의 시대였다.
그러나 전쟁이후 60년이 탄탄대로 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격변인 4.19와 5.16도 겪었고 1,2차 오일쇼크도 견뎌냈다. 1997년 말에는 나라의 곳간인 외화보유액이 텅텅 비 는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런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 분단의 아픔이 국민들 가슴에 응어리 진채 모든 것을 이겨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남한의 국내총생산(GDP)은 13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 해에는 963억 달러(약 1063조 1000억 원)를 기록했다. 1인당 국민소득(GNI)은 1953년 67달러에 그쳤으나 지난 해 1만 9296달러로 불어나면서 세계 200여 개국 가운데 당당히 13위에 올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우리나라의 현대 경제사는 이 자체가 민족의 웅대한 서사시가 됐다.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동북아의 신생독립국이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관용어가 됐다.
한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든 것은 핵심산업의 발전이다. 선박과 자동차, 반도체 등 중후장대형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결과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게 한 둘이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40여년 전 내걸었던 '수출입국'이라는 모토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5년 1800여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등록대수는 지난해 1733만대를 넘었다. 한 가구당 자동차 보유 대수는 0.9대 꼴이다. 전체 보유대수는 북한( 26만대 .2008년)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펴서 만든 '시발 자동차'를 신기한 듯 쳐다봤던 한국인들은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동차를 양산하고 있다.
소득향상과 식생활 개선, 의료수준 향상 등으로 평균수명(기대수명)도 남성 76.2세, 여성 82.9로 남녀모두 지난 1970년대 비해 16배이나 늘어났다. 북한은 남 성 67.9세, 여성 72.4세로 남한과 10세정도 차이가 난다. 6.25전쟁 직후인 영아사망률은 남한이 138%인데 비해 북한은 90%였다. 그러나 올해 남한은 4.4%로 확연히 떨어 진 반면 북한은 48%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성공 신화는 체제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이후 건국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주의 대신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택한 대한민국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다함께 잘 살자'는 공산주의를 택했던 북한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
6.25전쟁 전에도 택시는 있었다. 서울에 택시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일제시대다. 택시요금 기본구간이 2km로 된 것은 1949년이다. 당시 가격은 200원(圓).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0.2원이다. 택시 등록대수는 서울수복때인 1950년대 전국에 총 1745대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반발하면서 수송대대 등으로 징병된 운전기사들이 돌아오면서부터다. 전쟁이 끝난 1965년 12월 전국 택시등록대수는 2만 5333대로 불어났다. 당시 운전기사는 유망직업으로 손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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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군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보급품이었다. 1950년대 말 가수 현인이 불렀던 '전우야 잘 자라'는 종전 10년 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다. 2절 끝에 나오는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가사는 군과 담배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웅변한다.
우리군은 1949년 군 창설직후 곧바로 군담배 '화랑'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가격은 3원. 당시 날아드는 포탄 속에 유일한 친구였던 화랑의 경쟁담배가 생긴 것은 전쟁직후 서민층의 담배로 알려진 '파랑새'다. 1955년부터 나온 담배는 1968년까지 6원에 판매됐다.
양낙규 기자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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