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家
[아시아경제 이창환 기자]1815년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는 재기를 노리는 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의 워털루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런던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영국이 패한다면 영국의 국채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위로 치솟을 터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의 스파이들은 즉시 정보를 모아 런던으로 보냈다.
$pos="L";$title="";$txt="";$size="247,247,0";$no="2009120415011449848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정보를 받은 로스차일드가의 셋째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즉시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덩달아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의 투매 열풍 속에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트릭이었고 국채가 휴지 조각으로 변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국채 가격은 급등했다.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의 차익을 챙겼고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했다. 로스차일드가문이 영국의 경제를 손아귀에 넣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는 18세기 말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가문의 창시자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그곳에서 소규모 무역업과 전당포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영세한 전당포 주인으로 남을 생각이 전혀 없던 마이어는 골동품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전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백만장자 윌리엄 왕자에게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팔았다. 그의 환심을 끌기 위해서다.
이후 윌리엄 왕자는 군주가 되고 마이어는 군주의 제 1 금고지기가 된다. 윌리엄은 마이어에게 3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금을 주고 운용을 맡긴다. 이 돈을 기반으로 마이어는 주식과 채권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가난한 전당포 주인에서 거부로 성장한 그는 금융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다섯 아들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로 보내 최초의 국제 은행을 설립했다.
아들들은 각 나라의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수지맞는 거래를 제공해 연줄을 맺기 시작했다. 연줄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왕, 전쟁, 유럽 최초의 철도 등에 자금을 대면서 명성을 얻었다. 결국 로스차일드 식구들은 힘을 모아 유럽 전역에 걸쳐 견고하고 효율적인 자금 사슬을 구축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동 자금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산업혁명에 자금을 공급했고 유럽 자금시장의 중심이 됐다.
이후 마이어가 죽고 셋째 아들 네이선이 로스차일드가의 수장이 되는데 그때부터 로스차일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네이선은 워털루 전투를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최고 은행가가 되었고 1826년에는 영국 중앙은행이었던 잉글랜드 은행을 지급불능 위험에서 구제하기까지 했다. 당시 많은 영국 회사들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투자했는데 1년 후 라틴 국가들이 지급불능을 선언하면서 돈을 빌려준 중앙은행이 망하게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네이선은 은행이 망하기 직전에 형제를 통해 프랑스로부터 긴급히 자금을 이전해 은행을 구했다. 쑹홍빙의 '화폐전쟁'에 따르면 1850년을 전후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총 60억 달러의 자금을 축적했다고 한다. 수익률을 6%로 계산하면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 가족의 자산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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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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