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미국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 공개 여파가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정치적 입지까지 흔들고 있다. 엡스타인과의 친분 논란에 휩싸인 피터 맨덜슨 전 산업장관을 주미 대사로 임명한 책임론이 집권 노동당 안팎에서 확산되고 있어서다.
EPA연합뉴스
영국 주요 언론들은 5일(현지시간) 일제히 스타머 총리의 거취가 위기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BBC는 "스타머에게는 더 이상 이런 상황을 감당할 여유가 없다"고 지적했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맨덜슨 사태가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스타머의 종말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전했다.
논란의 핵심은 스타머 총리가 엡스타인과의 관계가 알려진 맨덜슨을 미국 주재 대사로 임명한 과정이다. 스타머 총리는 지난 4일 하원 총리질의(PMQ)에서 총리실이 여러 차례 관계를 확인했지만, 맨덜슨이 그 범위를 왜곡해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맨덜슨은 국가와 의회, 노동당을 배신했다"며 "그를 임명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스타머 총리는 인사 검증 절차와 관련한 문건을 공개하겠다고 밝혔으나, 국가 안보와 외교, 경찰 수사를 이유로 일부 문건을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에 앤절라 레이너 전 부총리를 비롯한 노동당 의원들이 '은폐'라며 반발했고, 결국 정부는 모든 문서를 의회 정보안보위원회에 제출해 공개 여부를 위원회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당내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노동당 의원들은 스타머 총리가 초기에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인사 절차 뒤에 숨었다고 비판했다. 일부 의원들은 모건 맥스위니 비서실장의 해임을 요구했고, 블룸버그는 당내에서 스타머 총리의 '남은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분위기를 전했다.
이미 스타머 총리의 지지율이 급락한 상황에서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 에드 밀리밴드 에너지안보장관, 앤디 버넘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 등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야권도 공세에 가세했다. 제1야당 보수당은 엡스타인과의 친분이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을 임명한 것 자체가 판단 착오라며, 모든 인사 관련 문건을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스타머 총리는 관계가 검증 과정에서 거론됐다고 인정하면서도, 맨덜슨이 사실을 왜곡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자 금융시장도 반응했다. 이날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장중 4.59%까지 오르며 지난해 1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파운드화 가치는 달러 대비 0.4% 하락했다. 도이체방크는 보고서에서 "국채 약세는 스타머 총리 교체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맨덜슨의 귀족 작위 박탈과 추밀원 제외를 추진 중이며,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그가 과거 EU 통상 담당 집행위원 재임 시절 규정 위반을 저질렀는지 조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