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영기자
"키, 몸무게, 나이는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와 인생을 보여주세요."
걸그룹 오디션 슬로건이라기엔 믿기 어렵죠. 하지만 이 오디션을 거쳐 데뷔한 일본 아이돌 그룹 'HANA(하나)'가 난 9일 오리콘 차트 연간 랭킹에서 세일즈 부문 신인 1위를 차지했는데요. 지난해 말 일본 Z세대가 뽑은 2025년 화제의 인물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이 아이돌 산업의 오랜 명제를 깬 프로듀서는 한일 혼혈 래퍼 챤미나(ちゃんみな)씨인데요. 오늘은 일본 Z세대를 흔든 그룹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오디션 프로 '노노걸즈'를 통해 데뷔한 일본 아이돌 그룹 'HANA(하나)'. 공식 홈페이지.
하나는 2024년 10월부터 약 3개월간 진행된 일본 걸그룹 오디션 'No No girls(노노걸즈)'의 데뷔 조입니다. 일본 연예 기획사 BMSG와 래퍼 챤미나가 주관했는데요.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우리나라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과 비슷한 형식으로, 라운드를 거쳐 생존하는 사람들을 모아 최종 데뷔조를 선정합니다. 이때 외모나 나이는 보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국적도 상관이 없다고 해 일본 안팎으로 7000명 가까이 응모했다고 해요.
이런 슬로건을 내건 까닭은 프로듀서 본인의 과거 때문인데요. 지금은 우리나라 아티스트와도 협업하며 얼굴이 알려진 래퍼 챤미나씨지만, 정작 본인도 과거에 '내 외모나 목소리로는 아이돌을 하기 어려울 거야'라며 일단 가수를 포기하려던 시기가 있었다고 해요. 오히려 본인이 가진 재능이 외모 등의 조건으로 부정당했던 것이죠.
일본 오디션 프로그램 '노노걸즈'의 한국어 페이지. 노노걸즈 공식 홈페이지.
대신에 프로그램에서는 다른 3가지 'No(노)'를 내거는데요. 'No fake(거짓 없이 할 것), No laze(게으름 없이 열심히 할 것), No hate(혐오 대신 본인을 긍정할 것)'를 강조합니다. 오디션 과정에서 이것은 립싱크 금지, 가사에 거짓말 쓰기 금지, 자존감 스스로 깎아 먹기 금지 등의 이야기로 드러나는데요. 심사위원이 오디션 중간중간 자신감을 잃은 참가자에게 '본인한테 손가락질 하지 마', '(자책은)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라는 이야기를 건네기도 하죠.
덕분에 최종 데뷔조 선발전에 참가한 10인은 오디션 참가 후기로 "음악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보니 시간과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진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안 된다는 말만 들었던 삶이었기에 이런 멋진 곳에 나올 수 있었다"고 했는데요. 자기를 부정하는 모습에서 긍정적으로 바뀐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오디션 당시에도 흥행몰이에 성공했는데요. 지난해 1월 개최된 최종 선발전에서는 동시 접속자 56만명을 돌파했고, 무대가 개최된 요코하마 K-아레나에 관중 2만명이 몰리는 등 인기가 엄청났다고 해요.
그렇게 일본인 6명에 한국인 1명인 그룹으로 데뷔하게 되는데요. 그룹 이름은 일본어로 꽃을 뜻하는 '하나'가 됩니다. 챤미나씨는 "모두가 정말 열심히, 열심히 힘을 내 피어났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며 "시들지 않는 꽃을 함께 만들어 보겠다"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멤버 치마는 5살 때부터 노래, 춤, 랩을 했지만,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이었고, 한국인 멤버이자 맏언니인 지수는 뛰어난 가창력을 가졌지만 본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타입이었는데요. 또 랩을 잘하는 모모카는 저음인 본인의 목소리가 아이돌과 맞지 않는다는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이를 강점으로 내세워 데뷔에 성공하게 되죠.
HANA의 2번째 싱글 'Blue Jeans' 앨범 표지. 공식 홈페이지.
이런 서사에 감동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Z세대입니다. 일본 고교생신문이 전국 고등학생 2213명을 대상으로 '2025년 화제의 인물'을 조사했는데 그 안에 그룹 하나도 이름을 올렸는데요. '멤버 개개인의 개성이 풍부하다', '지금까지 들었던 'No'를 걷어내는 긍정적인 자신감이 팬들에게까지 힘이 된다'는 반응이 잇따랐습니다. 얼마 전 데뷔 1주년을 맞아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들의 약진에 연예매체도 주목했는데요.
일본 연예매체 리얼사운드는 "이들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요소는 다름 아닌 공감의 힘일 것"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을 흔들었을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아이돌 문화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외모, 순종적인 태도를 좋게 여기는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는데요.
그러면서 "하나는 오디션 때부터 그 벽을 돌파하는 존재였다. 앞으로도 콤플렉스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큰 희망이 되어 갈 것이 틀림없다"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외모와 나이라는 정형화된 기준을 앞세워온 아이돌 문화 한복판에서, 하나는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셈인데요. Z세대가 열광하는 이유도 '너희가 뭘 아느냐'는 세대론, 도전보다 안정을 추구해온 사회 분위기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건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