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手談)]'철의 수문장' 녜웨이핑 9단

'철의 수문장'이 세상을 떠났다. 중국 프로바둑 기사 녜웨이핑 9단이다. 한국 바둑 팬들에게는 섭위평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지난 18일 중국 베이징 영결식장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한 시대와의 헤어짐을 준비하는 시간. 바둑의 전설들이 그를 배웅했다. 녜웨이핑의 50년 지기 친구, 조훈현 9단도 그곳에 있었다. "다음 세상에 다시 만나 바둑 한판 두자." 조훈현은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녜웨이핑은 세계 바둑 전성기인 1980년대를 상징하는 기사 중 하나다. 중국에서는 그에게 기성(棋聖)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으로 대했다. 특히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녜웨이핑이 거둔 11연승은 지금도 신화로 남아 있다.

제1회 응씨배 결승은 우리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접전 끝에 조훈현이 녜웨이핑을 누르고 한국에 우승을 안겼다. 환희와 탄식이 교차했던 공간. 기쁨은 찰나에 머물고, 결과는 그저 하나의 조각일 뿐이다. 기사의 손놀림, 바둑알의 울림, 눈가의 미세한 떨림에도 사연이 녹아 있다.

이처럼 바둑은 인연을 기록한다. 수담(手談)은 시간과 공간의 장애물을 넘어 서로를 연결한다. 이념의 장벽도 뛰어넘는다. 흑돌과 백돌의 어우러짐은 상생의 희망을 품는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바둑의 묘미에 빠져드는 순간, 삶의 새로운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희로애락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인생을 관조할 여유가 생긴다. 결과 앞에서 초연할 줄 아는, 품격도 만들어진다. 그 묘미를 세상에 전해준 이의 부재가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시대는 결국 저문다. 계절의 변화처럼, 겨울이 가면 봄이 찾아온다. 그렇게 또 하나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둑의 거목은 떠나면서도 맹아를 남겨 놓는다. 사라짐은 끝남이 아니라 이어짐의 과정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녜웨이핑은 바둑의 부흥을 이끌고자 후학 양성에 힘썼다. 중국을 대표하는 창하오 9단, 구리 9단 등 걸출한 기사들이 그렇게 성장했다.

바둑의 교훈은 우리 정치에도 투영된다. 이어짐의 철학을 품는 이가 진정으로 시대와 동행할 수 있다. 대중의 지지를 경험한 정치인일수록, 위에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권력은 움켜쥐려 할수록 손에서 벗어난다. 권력이 뿜어내는 달콤함은 그저 스쳐 가는 바람이다. 잠시 품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가둘 수는 없다.

권력의 무게를 나눌 줄 알아야 삶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 정치 철학을 이어갈 누군가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수렴청정의 욕심을 내려놓고, 맹아가 아름드리로 성장하도록 힘을 실어야 하건만 우리 정치의 모습은 아쉬움이 남는다.

2000년 이후 지금까지 치러진 7번의 총선에서 새로 배지를 단 국회의원은 2000명을 헤아린다. 그중 대중의 기억에 남은 이는 얼마나 될까. 잠시나마 국회의원 배지의 무게감을 느껴본 뒤, 조용히 사라지는 이가 대부분이다.

권력 유지에 집착하니 정치의 발걸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결단이 필요할 때 주저하는 모습이 반복되면 시대의 흐름과는 멀어진다.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어느 정치인의 공간, 허망한 바람만이 그곳을 맴돈다.

정치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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