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없던 성인 애니메이션…무(無)에서 창조해야' 동심 잡던 K애니의 진화[2026 K애니]

0.6명 저출산 쇼크에 타깃 강제 이동
하청 기지서 'IP 스튜디오'로 체질 개선
"10년 뒤까지 내다보는 호흡의 투자 필요"

그동안 국내 애니메이션 스크린은 일본 작품의 안방이었다. 2023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지난해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체인소 맨: 레제편'이 다시 메우는 등 일본 거대 지식재산(IP)의 공습이 상수(常數)였다. 지난해 토종 애니메이션은 이 견고한 틈을 비집고 의미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특히 유아용 꼬리표를 뗀 작품들이 큰 관심을 받았다. 수백만 관객을 동원한 일본 대작에 비하면 아직 체급 차가 뚜렷하지만, 불모지였던 성인 시장에서 확실한 '생존 신호'를 타전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연의 편지' 스틸 컷

생존을 위한 강제 진화…"틈새시장서 가능성 봤다"

지난해 토종 성인 애니메이션은 유의미한 흥행 지표를 남겼다. 특히 '퇴마록'이 동원한 50만 관객의 함의는 묵직하다. 실사로 구현하기 벅찼던 오컬트 액션을 애니메이션 특유의 연출로 풀어내자, 3040 원작 팬덤과 1020 애니메이션 소비층이 동시에 반응했다. 한국형 장르물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렸다. '킹 오브 킹스'도 기독교 IP라는 한계를 딛고 131만 관객을 동원했다. 상업적 잠재력을 증명하며 시장의 크기를 키웠다.

애니메이션 영화 '퇴마록' 스틸 컷

타깃 이동은 선택이 아닌, 인구 절벽 앞에서의 강제 진화였다. 합계출산율 0.6명 쇼크에 산업의 기존 성공 방정식이 파괴됐다. 완구 판매와 키즈카페 수익에 의존하던 '키즈 비즈니스'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 업계는 지갑을 열 줄 아는 '영 어덜트(Young Adult)'로 좌표를 급선회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 애니메이션 영화 관람객의 60% 이상은 2030 세대였다.

새로운 흐름 속에 제작사들의 형태는 하청 기지에서 IP 스튜디오로 바뀌었다. 기술력은 좋으나 기획력이 없어 남의 그림만 그려주던 공임 중심 구조를 탈피했다. 기획·제작·배급을 총괄하며 IP를 직접 소유하기 시작했다. 자체 IP 없이는 거대 플랫폼의 정책 변화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독자 생존의 길을 열었다.

냉정히 보면 초기 단계…10년 대계 필요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 스틸 컷

희망의 불씨를 확인했지만, 안착을 논하기에 현실의 벽은 아직 높다. 조영신 동국대 미디어연구소 대우교수는 "아직은 테스트 베드(Test-Bed) 단계"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의미 있는 시도였던 '연의 편지(22만 관객)'조차 흥행 성적은 아쉬운 수준이었다"며 "한국에는 없던 성인 애니메이션 시장을 무(無)에서 창조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눈앞의 성적표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시장 자체를 형성하는 '공급의 지속성'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조 교수는 우회 전략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는 "직접 배급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 혼자만 레벨업' 사례처럼 일본 시스템을 경유해 노하우를 흡수하고 글로벌로 진출하는 전략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분석했다. 15세 이상 타깃의 웹툰 기반 작품들이 꾸준히 소비되는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최소 5년에서 1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의 투자가 필수라는 조언이다.

콘진원 "단발성 성과 경계…IP 보유해야 국비 지원"

정부 역시 들뜬 분위기와 거리를 두며 산업의 기초체력 다지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콘진원 관계자는 "특정 작품의 관객 수만으로 산업 전반의 성패를 단정하기보다, 어떤 장르와 형식에서 관객 반응과 시장성이 확인되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주력 매체, 장르, 타깃 등 서로 다른 구조가 공존하는 복합적 특성을 전제로, 공공 영역에서 산업의 기반을 강화하고 장기적 성장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한 역할과 지원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의 가장 큰 고충인 '배급난'에 대해서도 원칙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콘진원 관계자는 "극장 개봉의 어려움은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모든 중·저예산 영화가 겪는 구조적 현실"이라며 단순 자금 지원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이어 "유통 성과는 단기적 재정 지원만으로 담보할 수 없다"면서 "기획 단계부터 플랫폼 연계와 타 산업 협업을 고려한 프로젝트 발굴을 통해 시장 환경 자체를 조성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결국 관건은 시간과 원칙의 싸움이다. 이제 막 열린 기회의 문이 다시 닫히지 않게 하려면, 일회성 흥행을 넘어선 '지속 가능한 창작'이 필수적이다. 척박한 땅에 어렵게 틔운 이 싹을 거목으로 키울지, 잠깐의 잡초로 남길지. 그 성패는 이제 막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10년의 인내'에 달렸다.

문화스포츠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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