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기자
#1. 중국 창청자동차(長城汽車)는 2019~2020년 배터리 사업 진출을 내세워 국내에 법인을 세운 뒤 이를 기술 빼가기 창구로 활용했다. 대학 산학협력단과 공동 연구를 하는 것처럼 꾸며 삼성SDI와 SK온 전·현직 직원들이 갖고 있던 배터리 설계도와 연구자료를 넘겨받은 것이다. 이 기술은 중국 현지 공장 건설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고 경찰은 2024년 1월 관련자 5명을 구속 송치했다.
#2. 2021년 삼성전자 자회사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장비를 생산하는 세메스 출신 인사는 국내에 세정장비 회사를 세운 뒤 전 직장에서 유출한 기술로 장비를 개발했다. 이 인사는 중국 장비업체의 국내 법인에 장비를 넘겼다가 적발됐다. 해당 인물은 78억원을 받고 인력과 기술을 넘겼으며 도용 기술로 양산 장비를 제작하던 중 검찰에 붙잡혔다.
국내 기업 활력의 마중물이 되는 '외국인직접투자(FDI)'가 기술유출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 국내 산학 협력을 고리로 기술을 빼가거나 외국인투자안보심사 기준이 50%라는 허점을 노리고 그보다 낮은 지분참여로 기업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FDI를 통한 기술유출 피해 규모는 최근 5년간 20조원을 훌쩍 넘었다. 이에 따라 FDI 유치 과정에서 안보심사 기준을 높이는 등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조수정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의뢰해 14일 내놓은 '외국인투자 안보심사제도 개선방안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2020년~2025년 6월)간 국내 기술유출로 산업계가 받은 피해 규모는 약 23조2700억원에 이른다. 해외로 유출된 기술 건수는 110건이고 그중 33건이 국가핵심기술인 것으로 파악됐다. 분야별로는 특히 반도체(33%)가 가장 많았고 디스플레이(20%), 전기전자(8%) 등이 뒤를 이었다. 모두 국가 전략사업들에 해당한다.
첨단산업에 대한 민간 투자는 FDI에 힘입어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2024년 국내 1000대 기업의 연구개발(R&D)비는 83조6000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FDI 증가와 함께 기술유출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합작법인(JV) 설립, 소수지분 투자, 해외 R&D 센터 설립 등 투자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약한 고리 역시 많아진 것이다.
재계에선 기술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제도 개선과 함께 대응책을 발 빠르게 마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단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약한 고리가 되지 않도록 기준을 강화하되, 국내 기업의 파트너십이 위축되지 않도록 정교한 운영이 병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