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한기자
박승욱기자
세계보건기구(WHO)는 1명의 자살 사망자가 발생하면 최소 5명에서 10명의 유족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선진국들은 자살 유족의 고통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적 '참사'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27일 자살 유족 지원 방안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자살 유족을 자살 생존자로 명명하며, 이들을 위한 지원을 국가 자살예방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고 있다. '자살 후 슬픔, 외상, 고통에 대한 대응: 국가 지침'은 공공보건 서비스 내에서 효과적인 사후개입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유족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보편적 전략' ▲자살 현장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 즉각적인 예방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택적 전략' ▲이미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있는 유족에게 전문적 치료를 제공하는 '지시적 전략' ▲이 모든 개입의 효과를 검증하는 '연구 및 평가 체계'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특히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포괄하는데, 유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안전한 메시지 전달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또한 의료인뿐만 아니라 장의사, 성직자 등 유족과 접촉하는 모든 직군에 맞춤형 교육을 실시해 사회 전반이 유족을 품을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영국은 중앙정부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가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공한다. '자살 후 지원: 지역 사별 지원 서비스 개발 및 전달체계 구성 가이드'는 서비스의 계획부터 실행, 평가까지의 과정을 10단계로 체계화했다. 이 프로세스는 지역사회의 자살 통계와 현황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 경찰·검시관 등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단계로 이어진다.
영국 모델의 핵심은 명확한 서비스 유입 경로다. 경찰이나 검시관이 자살 의심 사망자를 검시한 후 48시간 이내에 유족에게 연락해 서비스 동의 여부를 확인하고, 동의시 24시간 이내에 관련 기관으로 연계하는 신속 대응 체계를 갖췄다. 서비스를 거부하는 유족에게도 'Help is at Hand'라는 도움 정보 책자를 7일 이내에 우편으로 발송해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정보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는 행정 편의가 아닌 철저히 유족의 입장을 고려한 세심한 배려다.
호주는 '사후개입 가이드라인'을 통해 유족이 겪는 정보의 부재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다. 유족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실질적인 정보, 초기 대응자의 정서적 지원, 동료 지원 등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포괄적인 개입 방안을 제시한다. 호주 지원체계의 핵심은 'No Wrong Door' 접근법이다. 유족이 경찰, 병원, 학교, 커뮤니티 센터 등 어느 기관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적절한 서비스로 연결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유족이 복잡한 행정 절차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모든 서비스 제공 기관 간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다. 해당 서비스는 정보제공, 지원 서비스, 상담, 정신요법 등 4단계로 구분해 유족의 심리 상태와 위기 수준에 맞는 맞춤형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은 1998년 자살자 급증 이후 국가적 위기감을 느끼고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2006년 제정된 '자살대책기본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자살자의 친족 등에게 미치는 심각한 심리적 영향이 완화되도록 적절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유족 지원을 국가의 책무로 못 박았다. 유족 지원은 의료나 심리에 국한하지 않고 종합적인 케어로 정의한다. 유족은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가장의 부재로 인한 생계 곤란, 부채 상속, 법률 분쟁 등 복합적인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상담 및 의료 체계 강화뿐만 아니라 유족이 고립되지 않도록 유족과 접촉하는 모든 경로에서 지원 정보를 제공하고, 자조모임 운영을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등 전방위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국가 책임의 능동적 개입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유족 지원을 '장기적 관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경찰 수사 단계 등 사망 직후부터 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심리적 문제뿐 아니라 유족이 겪는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인력과 예산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살 유족은 극심한 고통과 사회적 낙인 때문에 지원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며 "가장을 잃은 유족, 자녀를 잃은 유족 등 대상을 세분화해 맞춤형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 109 또는 자살예방 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