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콘텐츠도 인플레이션 시대

마구 찍어내면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화폐만은 아니다. 디지털 콘텐츠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글, 이미지, 영상, 음악 등 모든 종류의 콘텐츠가 말 그대로 폭증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때문이다. AI는 콘텐츠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몇 번의 프롬프트면 그럴싸한 글, 이미지, 음악, 영상이 나온다.

스노(Suno)는 AI 음악 생성 플랫폼이다. 기초 작곡 이론은커녕 음표 하나 읽을 줄 몰라도 작곡을 할 수 있다. 그저 원하는 분위기와 느낌을 텍스트로 적절히 명령하기만 하면 된다. 스노 이용자들이 2주마다 만들어내는 음원의 양은, 스포티파이(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현재 보유한 음원 규모와 맞먹는다고 한다.

학계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AI로 쓴 듯한 학술 논문이 넘쳐난 지는 오래다. 이젠 그 논문을 심사하는 리뷰조차 AI가 쓴다. 국제머신러닝학회(ICLR)의 올해 논문 심사평 중 21%는 AI가 작성한 것이었다. AI가 개입하지 않은 'AI 프리(free)' 심사평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AI는 디지털 콘텐츠 생산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있다. 가짜·허위 콘텐츠 생산은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픽사베이

AI로 인한 콘텐츠 인플레이션은 양의 문제이자 질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3일(현지시간) 영국에서는 사진 한 장 때문에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북동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철도 다리가 무너졌다'며 한 이미지가 인터넷상에 퍼졌다. 철도 당국은 운행을 멈추고 긴급 점검에 나섰다. 현장에 가보니 별문제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가짜 이미지였다. 누군가의 사소한 장난이 한 사회의 교통 인프라를 마비시킨 것이다.

AI가 '생산성 혁명'을 가져올 것이란 기대가 많은데, 다른 건 몰라도 '사기와 허위' 생산의 급증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생산 비용이 낮아지면 공급이 늘어난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다. 사기와 허위의 생산 비용이 0에 수렴하면 인터넷에는 가짜가 넘쳐나게 된다. 반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는 비용은 여전히 높다. 사람이 현장에 가거나, 전문가가 분석하고 시간을 들여 검증해야 한다.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불신하고, 아예 회피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역설적인 서비스가 등장했다. 챗GPT 출시 이전(2022년 11월30일)에 만들어진 콘텐츠만 검색해주는 도구(Slop Evader)다. AI에 '오염'되지 않은 진짜 정보, 사람이 손수 만든 '100% 수제 콘텐츠'를 찾는 수요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AI발 콘텐츠 홍수 속에서 'AI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화폐 인플레이션 시기엔 현금 보유자가 손해를 보고 희소자산 보유자가 유리해진다. 콘텐츠 인플레이션 시기에도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AI로 쉽게 복제되는 콘텐츠의 가치는 떨어지고,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의 가치는 올라간다. 가짜가 넘쳐날수록 사실의 가치는 올라간다. 가치있는 신호와 무의미한 소음을 구분하는 일의 가치는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건 언론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다(라고 믿고 싶다). '콘텐츠 인플레 방어' 자산 포트폴리오에 '언론'이 한 자릴 차지하길 기대한다.

전략기획팀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