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선대회장 유산 '삼성 안내견'…32년간 시각장애인들의 빛이자 벗

26일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2주년 행사 열려
故 이건희 회장 뜻에 따라 '신경영' 선언한 1993년 설립
32년간 308마리 안내견 분양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4살 안내견 고리는 침착했다. 안대로 눈을 가린 기자가 보행 체험 중 장애물을 만나자 고리는 멈춰 섰다. 오른쪽으로 가자는 신호를 주자 그때야 고리는 장애물을 피해 다시 가던 길을 안내했다. 약 30보쯤 가 계단에 이르자 고리는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섰다. 신호를 주니 잠시 한 칸만 오르고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부터 계단이니 조심하라는 신호였다. 다시 내려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고리는 공중장애물까지 안전하게 피하는 길을 안내한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26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시범 안내견 '고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최동현 기자

26일 찾은 경기 용인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엔 고리를 비롯한 수십여마리의 안내견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견종은 모두 사람을 잘 따르고 착한 품성을 가진 레브라도 리트리버였다. 이제 막 훈련에 입문한 것처럼 보이는 천진난만한 강아지부터 졸업을 앞둔 듬직한 성인견까지 다양했다.

삼성 안내견학교는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하고 3개월 뒤인 9월 설립됐다. 이건희 회장이 초일류 삼성으로 도약하기 위한 변화의 첫걸음으로 사회공헌사업에 공을 들인 데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미발간 에세이 '작은 것들과의 대화'에서 "삼성이 개를 길러 장애인들의 복지를 개선하거나 사람들의 심성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건 이런 노력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감으로써 우리 국민 전체의 의식이 한 수준 높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설립 당시 기업이 안내견학교를 운영하는 사례는 전무했다. 세계안내견협회(IGDF)에도 기업이 운영하는 안내견학교에 관한 정관규정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삼성의 안내견 사업에 대한 진정성을 알아본 IGDF가 정관을 변경해 1999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공식 안내견 양성기관으로 인증하고 협회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현재까지 기업이 운영하는 안내견학교는 전 세계에서 삼성이 유일하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설립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안내견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육성하는 안내견들은 생애주기별 양성 과정이 다르다. 우선 안내견에 가장 적합한 성품과 건강상태를 지닌 리트리버 중 아빠·엄마견을 선발한다. 번식을 통해 매년 50마리 내외의 강아지가 태어난다. 생후 3개월차가 되면 약 1년간 퍼피워킹을 진행한다. 퍼피워킹은 안내견으로 성장할 강아지들의 사회화를 위해 일반가정에서 위탁 양육하는 자원봉사 활동이다. 퍼피워킹을 마치면 건강검진과 성격진단 등 종합평가를 거쳐 6~8개월간 본격적인 안내견 훈련에 돌입한다. 23개월차가 되면 시각장애인의 성격·직업·걸음속도 등을 고려한 파트너 매칭을 진행한다. 이후 한달간 파트너와 동반교육을 받은 뒤 분양식을 거쳐 정식 안내견 활동에 나선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1994년 첫번째 안내견 '바다' 이래 매년 15마리 내외를 분양하고 있다. 32년간 308마리의 안내견을 분양했고 현재 85마리가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안내견 육성엔 자원봉사자의 헌신이 큰 힘이 됐다. 안내견은 생후 훈련기간 약 2년과 활동기간 7~8년, 은퇴 후 노후돌봄 등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퍼피워킹 봉사와 은퇴 안내견 돌봄 등 그동안 2800여가구가 안내견 봉사에 참여했다.

이날 안내견학교에서는 개교 3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선 안내견 분양식과 은퇴식이 진행했다. 행사엔 퍼피워커와 시각장애인 파트너, 은퇴견 입양가족, 안내견학교 훈련사 등 안내견의 전 생애와 함께한 이들이 참석했다. 퍼피워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들이 키운 강아지가 안내견으로 성장해 시각장애인 파트너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며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파트너이기도 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과 이연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문화 삼성화재 사장 등도 기념식을 찾았다.

이 사장은 "안내견학교의 32년은 자원봉사자와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나된 걸음으로 노력했기에 가능했다"며 "시각장애 파트너와 안내견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사회적 환경과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예비 안내견들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삼성화재

경제금융부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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