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영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6시간 만에 해제하면서 총 16번이나 선포됐던 대한민국의 계엄령 역사가 회자되고 있다.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다. 대한민국 헌법 77조에 규정돼있다.
이는 다시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뉘는데, 계엄법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에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경우 선포할 수 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되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된다.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서 계엄령은 총 16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 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 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 지역에 선포됐다. 이후 6·25 전쟁으로 첫 전국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에서도 이어지는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이후에도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26 사태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 발령됐다. 이후 1980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 1981년까지 유지했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계엄군을 투입한 무력 진압을 실시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민주화 항쟁 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는 대통령 의사만으로 계엄을 즉각 선포할 수 없도록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규정하고, 재적 국회의원 과반 찬성으로 해제가 가능하도록 국회의 사후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에서 국가 수장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물론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검토했던 증거들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으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이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면서 결국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