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종기자
"다행히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있어서 우리 이차전지 기업들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 벤처캐피털 업계 고위 관계자를 만나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의 경쟁력에 대해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IRA가 없었더라면 이미 시장의 상당 부분을 중국 기업에 빼앗겼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와 함께 말이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에 총 3690억달러(약 516조원)의 정부 예산을 쏟아붓는 IRA는 2022년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곧바로 시행됐다. IRA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청정 에너지 지원법이다. 막대한 보조금을 전기차와 태양광, 풍력발전 등에 지원한다. 다만 그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중국과 같은 해외우려기관(FEOC)으로부터 조달받은 부품을 사용할 경우에는 보조금 지급이 제한된다. 미국에 배터리 등 첨단 생산 시설을 건설할 경우에는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IRA 시행으로 중국 이차전지 기업들의 미국 진출은 상당히 어려워졌고 한국 기업들이 수혜를 입었다.
이렇게 한국 배터리 기업에 온실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IRA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IRA 폐지나 축소를 주장해 왔다. "기후 위기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가 차기 에너지부 장관에 지명됐다. IRA가 폐지되거나 축소될 경우 미국 시장에 의존해왔던 한국 이차전지 기업들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일부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투자한 지역이 공화당 지역구인 점 등을 들어 IRA 축소가 쉽지 않을 것이란 희망을 내놓고 있다. 지나치게 상황을 비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투자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괜찮을 거야"라고 마냥 손놓고만 있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그동안 어땠는가. 미국 시장 진출길이 막혔다고 해서 중국 이차전지 기업들의 점유율이 줄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유율이 점점 늘어 중국 이외의 시장에서도 한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기업과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 내수 시장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 주요 배경 중 하나겠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중국 전기차나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시장 진출이 여의치 않자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에 이어 중남미까지 무섭게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블룸버그 NEF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브라질에서 판매한 전기차 10대 중 9대는 중국산이었다. 중국 기업은 시장을 다변화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중국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의 약점이었던 낮은 에너지 밀도의 문제를 혁신적인 셀투팩(CTP) 기술을 통해 극복했다.
우리는 IRA가 시행되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중국에 대한 지나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고 중저가 전기차 시장에서도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을 내놓아야 했다. 그동안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몰래 숨겨놨던 비장의 무기가 있기를 바란다.
트럼프가 당선되자 중국 최대 배터리 기업인 CATL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본다. 이제 다른 나라 정부가 한국 기업을 지켜줄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