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기자
‘침체의 늪’에 빠진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사업재편을 위해 공정거래법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정부가 난색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정산업에만 예외를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담합 의혹으로 업계 내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구조조정 골든타임만 놓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등 롯데그룹 석유화학계열사 임원들은 책임경영 차원에서 이달부터 급여 일부를 자진 반납하기로 하는 등 업계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석유화학업계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이 기업 간 구조조정을 막고 있어 이를 완화해야 한다고 수 차례 정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업계와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법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200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불황 산업에 공정거래법을 유예한 사례는 없다"며 "우리나라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국제 기준을 따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도 "아직 구체적인 요청은 없지만 최근 특정 산업에만 규제를 완화한 사례는 없다"며 반대를 피력했다.
공정거래법은 석화기업 간 구조조정 논의를 가로막는 핵심으로 꼽힌다. 생산 구조를 재편하려 해도 기업 간 협력과 합병이 독과점 규제에 막혀있기 때문이다. 현행 공정거래법 제3장 9조에 따르면 특정 거래 분야에서 시장점유율이 1위거나 시장지배적 사업자 요건(점유율 50% 이상)에 해당할 경우 기업 간 결합을 독과점 행위로 간주해 공정위의 시정 조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석유화학의 쌀’인 에틸렌의 경우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의 국내 생산 점유율은 각각 26%와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설비를 통합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고 해도 44%로 점유율이 높아질 경우 과점 규제를 받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사업재편인데 규제 때문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석화업계가 공정거래법 적용 예외를 요청하는 건 일본 사례를 참고한 결과다. 일본은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석유화학 업계 수익성이 나빠지자 정부가 석화산업에 한해 공정거래법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해 구조조정을 지원했던 ‘불황 카르텔’을 발동한 바 있다. 당시 일본 나프타분해설비(NCC) 가동률은 1980년대 이후 60%대에서 90%대까지 회복했다.
김서연 나이스신용평가 연구원은 "석유화학 사업 재편은 미래 사업경쟁력을 강화하고 이익창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며 "점진적인 설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장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국내기업 간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에 의한 규모의 경제 확보, 업체 수 감축 등을 통해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본질적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올 연말 예정된 정부의 석화기업 경쟁력 제고 방안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세제 혜택과 같은 재정적 지원뿐 아니라 플라스틱 재활용 등 신사업 인프라 구축과 규제 완화 방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오히려 구조조정 적기를 놓쳐 회복이 어려운 상황까지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3분기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의 석화부문은 모두 적자를 기록했다. 롯데케미칼 임원들은 급여의 10∼30%를 자진 반납한다. 급여 자진 반납이 몇 개월 동안 이어질지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