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대구 서문시장에는 국수골목이 있다. 수십 개 노점이 모여서 국수를 파는, 서문시장의 중심가에 있다. 지난 1일 비가 와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뜨뜻한 국물을 먹기 위해 국수골목을 찾았다. 빠르게 말아주는 국수를 먹고 일어난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금방 채우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지복희씨(72·여)는 38년째 국수골목에서 커피를 파는 터줏대감 격이다. 카페 하나 찾기 어렵던 시절, 지씨는 국수를 먹고 일어난 사람에게 재빠르게 커피를 타서 팔았다. 이제는 커피 주문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침에나 몇몇 지인이 커피를 마시러 오지, 점심때 국수를 먹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씨의 눈은 휴대전화를 향했다가도 칼국수를 먹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계속 쳐다봤다. 그는 요즘에는 노인도 카페를 간다고 투덜댔다.
그래도 지씨는 이곳을 오래 지킨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국수골목을 '대권 골목'이라고 불렀다. 이 골목에서 유세한 대선주자는 여지없이 대권을 잡는다는 것이다. 지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추억하면서 국수골목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기 왔을 때 정말 난리가 났었어. 그이가 키가 작잖아. 조그마한 사람이 의자에 올라선 채로 여기서 연설하던 게 기억나." 윤석열 대통령 역시 국수골목을 지나갔다. 하지만 윤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다지 추억거리를 쏟아놓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윤 대통령에 대해 말했다. "그때는 힘 있어 보이고 그랬는데, 실망스럽지."
대구 서문시장은 조선시대 때부터 전국 3대 장터로 불렸다. 섬유나 의류 자재의 '메카'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서문시장을 방문하면서 '보수의 심장'으로 떠올랐다. 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선을 하루 앞둔 2022년 3월8일 서문시장을 찾아 지지를 호소했다. 당선 직후에도 서문시장을 방문해 전폭적 지지에 감사함을 나타냈다. 지금도 서문시장 곳곳에서는 윤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걸어둔 가게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10일)을 맞는 지금, 서문시장의 민심은 어떨까. 하필 기자가 찾은 11월1일은 윤 대통령의 지지도가 처음으로 10%대를 기록한 날이었다. 여론조사 업체 한국갤럽이 지난달 29~31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5명을 대상으로 윤 대통령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는 19%로 집계됐다. (무작위 추출 무선 가상번호 인터뷰 방식·응답률 11.1%) 영원한 아군처럼 보였던 대구·경북 지역의 지지도는 18%로 평균치보다 낮았다. 이날 "윤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서문시장 상인들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노인은 "도둑놈이나 하는 정치, 내가 잘 알겠냐"고 호통쳤다.
호떡이나 어묵을 파는 중심가가 아닌, 의류 자재를 파는 골목길로 깊숙이 들어가니 서문시장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0년째 서문시장에서 옷감을 파는 박흥배씨(67·남)는 "가슴이 갑갑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20대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찍었다. 과거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부터 시작해서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정부를 향했던 칼날까지 윤 대통령만큼은 강직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 강직함이 독이 된 것 같으냐'는 질문에 박씨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예전에는 정치인들이 싸우다가도 화합이 필요한 때에는 막걸리 한 잔씩 걸치면서 속내를 털어놨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모습 찾기 어려워요." 여야 간 극단적 대치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을 윤 대통령으로 본 셈이다.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윤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낙제점을 줬다. "인생 살아보니까, 리더십은 독단적으로 하는 게 아니더라고. 모두의 말을 듣고 포용하는 것, 그게 리더십 같아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울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30년째 서문시장에서 의류 자재를 파는 강승호씨(52)는 10분 넘게 말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여기 보세요." 강씨는 주변을 둘러보라고 했다. 가끔 한두 사람이 지나갈 뿐 장사하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강씨는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가 없었다고 호소했다. "정치인 그 누구도 경제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코로나19 때가 나았지. 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들이 돈 쓰러 다니면서 소상공인들 숨통이 트였어요."
일명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를 둘러싼 여러 의혹에 관해서 묻자 강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야 모두 민생은 뒤로 제쳐두고 치부만 드러내려는 정치에 학을 뗐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김건희 여사나 명씨만 찾고, 정부·여당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 혐의만 찾고 있고, 싸우는 모습만 보이는데 어떻게 정치를 신뢰합니까? 저거 한 번 보세요." 강씨는 자신의 머리 위에 달린 텔레비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하필 텔레비전에서는 민주당이 윤 대통령과 명씨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서문시장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진 듯 보였다. 윤 대통령이 기대 이하의 국정 운영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니 지켜줘야 한다는 부채감 역시 커 보였다. 서문시장 사람들은 2017년 박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잃은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강씨는 탄핵에 관해 묻자 박 전 대통령을 언급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 부부가 심각한 비리를 저지른 걸로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야당이 탄핵을 너무 자주 꺼내는 것 같긴 해요. 박 전 대통령을 한 번 탄핵하고 나니 심심하면 탄핵을 말하는 것 같다니까."
박씨는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엮이면서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봤다. 윤 대통령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에 대한 거부감도 함께 드러낸 셈이다. 그는 "민주당이 지금 조기 퇴진이나 탄핵을 운운하는 건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며 "민주당을 신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직 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탄핵을 언급하는 건 국가를 흔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는 인물 보고 뽑지 않아, 당을 보고 뽑지." 지씨는 대구 사람들이 무조건 보수 진영 후보자를 뽑는 것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다음 대선에서 보수 진영이 내세운 대통령 후보를 뽑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 많이 했지. 우리 어려울 때 밀가루 사다 먹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놓은 게 있으니까 아마 대구 사람들은 보수 진영을 지지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