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권기자
현대자동차와 기아, BMW, 벤츠 등 국내외 자동차 기업들이 ‘부품 비공개’라는 관행을 깨고 전기차 핵심인 배터리 제조사를 잇달아 공개하고 나섰다. 자동차 업계는 오랫동안 ‘브랜드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원칙에 따라 부품 제조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에도 배터리 메이커를 공개하라는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소비자들과 정부 압박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각 메이커가 차종별 배터리 제조사를 전격 공개했음에도 ‘전기차 포비아’ 현상을 잠재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전기차 배터리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배터리는 여러 개의 팩으로 구성되는데, 하나의 팩에는 수천 개의 셀이 들어 있다. 또 각형, 원통형 등 모양도 다르고 성분도 니켈·코발트·망간(NCM), 리튬인산철(LFP) 등으로 구분된다.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린다면 성분과 구체적인 모양까지 모두 공개해야 맞다. 하지만 이들 메이커는 차종별 배터리 제조사만 명시했다. 배터리 성분과 모양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차이는 무시하고 제조사 이름으로만 성능과 역량을 판단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인천 벤츠 EQE 화재와 비슷한 시기 충남 금산에서 불이 난 기아 EV6에는 국내 배터리 대기업이 만든 배터리가 탑재됐다. 이 배터리는 기아뿐 아니라 중국산 논란을 부른 벤츠의 또 다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EQB에도 들어가 있다.
전기차 화재는 제조 결함 같은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양극과 음극 사이의 분리막 파손, 과충전으로도 발생한다.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해 안전성 면에서 진일보한 전고체 배터리가 나오면 몰라도 현재로선 제조사 공개만으로 소비자가 전기차를 안심하고 구매하기를 바라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배터리 제조사를 전부 공개하기 전부터 일부 차 업체들은 이미 고객들의 문의가 있으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 고객 입장에선 마음에 드는 모델에 원치 않은 메이커의 배터리가 탑재될 수 있다는 점도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배터리 공급처 노출은 차 메이커와 배터리 제조사 간 역학관계에 변화를 부를 것으로 보인다. 차 업체는 배터리 공급처를 숨겨 가격을 내리는 등 협상력을 유지해왔는데, 제조사가 전부 공개되면서 구매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전기차 화재는 수년 전 관심을 모았던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사건을 떠올린다. 신재생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ESS 설치가 꼭 필요한데, 화재사건이 잇달으면서 수요가 크게 위축됐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전기안전공사에 따르면 태양광 발전과 연계된 ESS 설치 개수는 2018년 643개(1319MWh)에서 2021년 30개(96MWh)로 급감한 데 이어 지난해엔 겨우 3개(1MWh) 설치에 그쳤다. 풍력과 연계된 ESS는 2017년 16개에서 2020년 2개로 줄었고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설치 실적이 전무했다. 2020년 이후 매년 10만대 이상 꾸준히 유지하는 전기차 시장이 ESS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
제조사만 공개하는 ‘배터리 실명제’는 전기차 신뢰 회복 조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차 업체들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값싼 중국 배터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라지만 중국 CATL은 배터리 점유율 세계 1위다. 오히려 배터리 안전을 강화하는 구체적인 조치만이 전기차 포비아를 잠재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