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오지은기자
최영찬기자
지난 6월 7일 오후, 경기 부천시 소사구의 지하철 1호선 부천역 앞. 언제나처럼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직장인이나 학생도 있었지만, 이날 따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벤치를 침대 삼아 누워있었다. 곳곳에서 신경질을 내는 듯한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대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막걸리 병을 손에 쥐고 논쟁을 벌였다. 혹시 정치 팬덤도 이렇게 독특한, 일반인과 무언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에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이가 기자에게 다가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 스타일, 단정한 셔츠와 면바지,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팬덤인 이정혁씨(가명·32·남)는 평범한 30대 남성이었다.
"원래 게임회사에서 시나리오 제작을 담당했는데 지금은 좀 쉬고 있어요." 이씨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근황을 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이야기의 본론인 '정치인 팬덤'과 관련해 질문하자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민주당을 지지하게 된 이유, 독일의 나치 등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22대 총선에서의 여론조사 추이 등 웬만한 정치평론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해박한 정치 지식을 뽐냈다. 뛰어난 지식을 칭찬하자 이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존을 위한 공부였어요. 민주주의는 시민 하나하나가 깨어있어야 하잖아요."
단순히 정치인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분석하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흡사 연예인 팬덤이 밤늦게까지 '덕질'(취미에 심취하는 행위)하는 모습 같았다. 이씨는 매일 온라인 카페 '민주당의 민주화 운동'(민민운)에 하루 동안 나온 민주당 관련 기사를 취합해서 올린다. 아울러 총선 때는 쏟아지는 여론조사를 정리하고 선거 향방을 분석하는 글도 작성했다. 22대 총선 기간에는 1주일 평균 10개 정도의 분석글을 민민운에 올렸다. 연예인 팬덤들이 트럭 시위하듯 국회 앞에 우원식 국회의장의 당선을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걸기도 했다. 플래카드에는 "나는 니들이 지난 의장후보 투표 때 한 짓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씨는 "이런 활동을 하는데 길어봐야 하루 1시간도 투자하지 않는다"며 "취미 활동을 하듯 개인적인 시간을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속 명대사가 지금 정모씨(64·여)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진다. 정씨는 캐나다에서 운영하던 교육업을 접고, 잠깐 휴식도 할 겸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면서 재밌게 살던 와중에 22대 총선 때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한 대표를 보게 됐다. 정씨의 첫 감정은 "신선함"이었다. "저는 정말 정치에 하나도 관심 없었어요. 정치하는 사람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한동훈은 달랐어요. 아직 타락하지 않은 정치인의 모습을 그에게서 봤어요."
정씨는 한 대표의 팬카페 '위드후니'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게시물을 보는 건 아니고 한 대표와 관련해 긍정적인 소식 위주로 살핀다. 한 대표가 잘 돼야 정씨의 기분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과 중에 수시로 위드후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정치인 팬덤 활동이 일상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게 정씨가 나름 세운 원칙이다. 정씨는 자기 전에도 위드후니에 들어가서 한 대표 관련 게시물을 본다. 그래서인지 꿈에 한 대표가 나오기도 했다. "꿈속에서 한 대표가 코트를 입고 이불 속에 누워 있더라고요. 그 장면이 왠지 너무 슬펐어요. 하지만 꿈꾸고 난 후에 한 대표가 자신은 싸울 수 있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서 마음이 안정됐어요."
이들이 정치인 팬덤 생활을 시작한 계기는 '얼굴이 잘생겨서' '남들도 좋아해서' 등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정치인에게 최대한의 지지를 보내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길 원했다. 자영업을 하는 강모씨(51·남)는 과거 통합진보당을 지지할 정도로 뚜렷한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 전 대표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가 꿈꾸는 '광장 정치'를 실현할 유일한 인물이 이 전 대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씨는 "이 전 대표가 민주당 당권을 잡으면서 '당원 주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어냈다"며 "기득권자를 타파하려면 광장 정치밖에 답이 없는데, 운동권 등 계파에 휘둘리지 않는 이 전 대표가 적격"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직장인 김모씨(37·남)는 이 전 대표의 차기 대권 도전을 막기 위해서 한 대표의 팬덤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이미지, 어느 정치인과 맞붙어도 지지 않는 말솜씨여서 한 대표가 충분히 대권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게 김씨 의견이다. 김씨는 한 대표를 지지하는 팬덤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에 한 대표 팬덤 오픈채팅방 3개를 운영하고 있다. 그중 하나에는 팬 1700명이 들어와 있다. "이재명은 정말 한국을 공산주의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이재명을 막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한동훈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동훈은, 이재명을 잡는 저의 도구입니다."
이들은 정치인 팬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씨는 부모님과 정치 관련 이야기는 나눠봤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팬덤 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모르실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정치 고관여층이 아니기도 하고, 어머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가도 외교를 잘한다는 이유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하더라고요." 당연하게도 회사 사람이나 친구들에게도 정치인 팬덤 활동을 숨겼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항변도 내놓았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보다는 정치인 팬덤 활동을 하는 게 한국 사회의 발전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강씨는 "그 정치인이 잘했거나, 앞으로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 자발적으로 모인 집단이 팬덤 아니냐"며 "강성 또는 극단적 지지자라고 비판하는 건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팬덤을 부러워하는 정치인들이 더 비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정치인 팬덤 현상이 다소 해소될까. 이씨는 웃으면서 답변을 내놓았다. "정치에 굳이 관심 안 가져도 되는 세상이 오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