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할 만큼 다 했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시대 정신을 담은 노래로, 또 대학로 소극장 문화의 상징 ‘학전’ 대표로 대한민국 대중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가수 김민기가 21일 밤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최근 폐렴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며 20일 응급실에 입원했고, 이튿날 눈을 감았다.
22일 학전 관계자는 “대표님은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학전 폐관과 관련해선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화가를 꿈꿨던 소년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경 후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미술에 몰두했던 그는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획일적인 수업 방식에 곧 실망한 그는 한 학기 만에 붓을 내려놓고, 고등학교 동창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와 포크송 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명동 YWCA '청개구리의 집' 무대에 오르며 '아침이슬'을 작곡한 그는 가수 양희은과도 이곳에서 인연을 맺었다.
1971년 발표한 데뷔 음반 ‘김민기’는 자신과 세상을 끌어안고 고뇌하는 동시대 청년의 비판적 시선을 진실하게 담아낸 명반으로 꼽힌다. 수록곡 ‘아침이슬’은 1971년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지만,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사회 분위기가 얼어붙으며 1년 만에 그의 앨범 수록곡은 대부분 금지곡에 지정돼 전량 압수됐다.
그가 군 제대 후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77년 부평의 한 봉제공장에 취직해 일하며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였다. 이처럼 건설 현장 노동자로, 탄광 광부로, 민통선 마을의 농사꾼으로 살면서도 김민기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과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이어나갔다.
1983년 김민기는 서울로 돌아와 ‘노래를 찾는 사람들’, ‘겨레의 노래’ 음반을 제작했다.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도 연출했다. 1993년 그는 학전 개관 비용 마련을 위해 그동안 썼던 노래를 모아 총 4장으로 구성된 ‘김민기 전집’(1993년)을 발표했다. 판매 금지 조치된 데뷔 앨범 이후 첫 음반이었다.
음악에 이어 극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1991년 3월 1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고 라이브 콘서트와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올렸다. ‘배울 학(學), 밭 전(田)’이란 이름처럼 문화예술계 인재를 키우는 못자리 역할에 충실했다. 학전은 총 359편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을 제작해 국내 창작 뮤지컬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2007년 ‘지하철 1호선’으로 독일 문화훈장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서항석, 윤이상, 백남준에 이은 네 번째 수훈자였다.
‘학전’은 배우 사관학교로도 유명했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등 충무로의 스타 배우들이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배출됐다. 고 김광석을 비롯해 들국화, 안치환, 이소라, 윤도현 등 대중음악 가수들도 학전 무대에서 자신만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창작 뮤지컬로 안정된 레퍼토리를 확보한 후 그는 돌연 아동·청소년극 제작에 나섰다. 국내 공연계에서 불모지에 가까운 장르지만 고인은 남다른 애정과 책임감으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 우리나라 청소년의 현실을 다룬 작품을 꾸준히 학전 무대에 선보였다. 그는 “어린이들이 미래고 이들이 좋은 공연을 보고 자라야 한국의 미래 문화가 밝다”는 자신의 뜻을 작품에 실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어린이 공연 티켓 가격을 끝까지 올리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오랜 재정난과 건강 문제가 겹치며 김민기는 학전의 폐관을 결정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돕겠다는 문의가 쇄도했지만 그는 이를 모두 사양했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은 어린이극 ‘고추장 떡볶이’였다.
지난 3월 15일 문을 닫은 학전은 폐관 4개월 만인 지난 17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며 “나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식 또한 유가족 뜻에 따라 조의금과 조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학전 앞마당에 고인을 위한 일반인의 추모 공간이 마련된다.
유족으로 배우자 이미영 씨와 슬하 2남이 있다. 발인은 오는 24일 오전 8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역이다. 장지로 떠나기 전 운구가 학전 앞마당을 지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