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정책은 '권한'이 아닌 '책임'입니다

역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 중 가장 키가 컸으며(201cm) 이른바 ‘닉슨 쇼크’와 ‘오일 쇼크’의 결과로 나타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기준금리를 400bp(1bp=0.01%)나 끌어올려 전 세계 경제전문가들로부터 ‘큰 키만큼 금리를 올린 인물’로 회자됐던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 정책론에 비판적이었으며 오늘날 인플레이션 관리 정책을 논함에 있어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제12대 연준 의장인 폴 볼커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거두지 않았다. 의장 재임 기간 시중금리는 연 21.5%라는 역대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고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18%를 웃돌았다. 미국 역사상 금리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 정치권의 각종 회유와 자칫 비극적인 사고로 이어질 뻔한 무장 괴한의 위협 등이 잇따랐으나 스스로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도 고금리 통화정책을 고수했다.

그의 신념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지만 시장과 경제주체에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0%를 웃돌던 인플레이션이 낮아지지 않을 경우 통화정책의 변화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볼커 쿠데타’는 성공했고, 한동안 미국 경제 활황의 초석이 됐다. 볼커는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복기하며, 정책은 ‘권한’이 아닌 ‘책임’이며 국민이 삶을 이롭게 할 ‘유능한 정부’의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2024년 7월. 한국 경제는 부채관리 담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담론의 중심에는 단연 가계부채가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의지에 의문까지 제기되며 금융권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올해 초 정부가 공언한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계획은 1단계에서 7월부터 2단계로 강화될 예정이었으나 일주일을 남기고 전격 연기됐다. 스트레스 금리가 100% 반영되는 3단계 적용 시기도 내년 1월에서 7월로 6개월 연기하면서 ‘잠정적’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더욱이 보도자료와 팀장급 백브리핑으로 스트레스 DSR 연기를 시장에 통보했다. 일선 금융사들은 계수관리 계획과 영업 전략을 급하게 수정해야 했고, 소비자들은 대출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그 사이 가계부채 관리 목표는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 맞춰 슬그머니 바뀌었다. 연초만 해도 정부와 은행권이 공연하게 외부에 알린 올해 가계대출 증가 폭 관리목표는 1.5~2% 수준이었다. 그러나 가계대출이 최근 3개월 동안 14조원 급증하자 ‘정책대출을 제외한 2~3%’ 수준으로 수정하는 한편 부랴부랴 가계부채 점검 회의를 늘렸다. 1단계 스트레스 DSR 제도가 제대로 시행됐는지, 정책대출은 정상적으로 이뤄졌는지 살피겠다며 검사에 나서기도 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현민 기자 kimhyun81@

일련의 과정을 두고 정부의 목표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으로 하겠다는 대책도 예정대로 시행될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여기에 새로운 GDP 통계를 적용하면서 100%를 웃돌던 가계부채 비율이 93.5%까지 떨어진 착시효과에 안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진 사례는 비단 가계부채만이 아니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 구조조정, 취약계층과 소상공인 정책, 끊이지 않는 금융사고 관련 정책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정책은 신뢰를 잃은 순간 반드시 가늠할 수 없는 부작용을 야기한다. 이제 그 신뢰의 책임은 22일 인사청문회를 마친 김병환 금융위원장 후보자의 몫이 됐다.

경제금융부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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