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경기자
사람들이 내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우선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대체로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발언권이 큰 사람이어서 조심스럽기 때문이거나 혹은 내가 더불어 말하기에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거나. 전자라면 발언권자로서 말하기 장면을 세심히 살펴야 하고 후자라면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에 말하기 장면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면 후자의 유형이 되어 버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발언권이 생기면서 벌어지게 되는 발언권 독점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더 세심하게 말하기 장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내 앞에서 말하는 것을 안전하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에 있어서 '경청'이라는 예의를 강조한다. 누군가 말을 하면 열심히 듣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예의란 한쪽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청은 듣는 사람의 예의이지 말하는 사람의 예의는 아니다. 말하기의 예의로 우리는 '경청'이라는 다소 일방향적인 예의만을 이야기해 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말하는 사람의 예의는 무엇일까?
바로,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내 말을 열심히 들어 주고 있다면 나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어야 한다. 내 말에 경청의 예의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나도 경청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 발언권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의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발언권을 독점하는 것은 그래서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청의 예의를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발언권이 생겼다는 것은 자칫 발언권을 독점하는 무례한 사람이 되기 쉬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발언권은 그래서 말하는 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배분하는 권리라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신지영, <신지영 교수의 언어감수성 수업>, 인플루엔셜,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