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수기자
기업들의 재무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유상증자 시장이 상당히 위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과 금융회사들이 대주주의 자금 부담이 큰 유상증자를 꺼리면서 상장사의 신주 발행 규모가 급감했다. 유상증자는 중견 기업의 전유물이 됐다. 재무 상황이 악화한 대기업과 금융사들은 증자 대신 신종자본증권(영구채)과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 후순위채 등을 발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있다. 3종의 채권은 고금리 채권이긴 하지만 발행액 전부 또는 일부를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 유상증자의 대안으로 활용된다.
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계열 상장사 중에 올해 상반기에 공모 방식으로 유상증자를 실시한 곳은 LG디스플레이가 유일하다. LG디스플레이는 실적과 재무상황이 빠르게 악화하면서 지난 3월에 1조2925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지난해 한화오션(1조4971억원), 롯데케미칼(1조2155억원), SK이노베이션(1조1433억원), CJ CGV(4153억원), 현대지에프홀딩스(3634억원), OCI홀딩스(3307억원), 한화솔루션(576억원) 등에 비하면 대기업 상장사 유상증자 건수가 확 줄었다.
대기업 유상증자가 줄면서 올해 상반기 상장사의 유상증자를 통한 신주 발행 총액도 2조8000억원에 불과했다. 2022년과 지난해(2023년) 연간 8조원대의 유상증자가 이뤄진 것에 비하면 시장 규모가 대폭 감소했다. 2021년에는 유상증자를 통한 신주 발행액이 16조8000억원에 달했다. 상반기 신주 발행액은 최근 3년간 반기 기준 유상증자액 평균(5조5500억원)의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대기업 계열사뿐만 아니라 금융회사들도 유상증자를 하지 않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유상증자를 실시한 금융회사는 KDB생명보험 한 곳뿐이다. KDB생명보험은 한국투자증권을 주관사로 삼아 재무구조 개선용 자금 2990억원을 마련했다. 대주주인 KDB산업은행이 전액 출자했다. 지난해에는 하나F&I, KDB생명보험이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2021년과 2022년에 금융회사 유상증자가 한 건도 없었다. 금융회사의 유상증자 위축 현상은 수년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중견 기업의 유상증자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올해 대한전선(4625억원), 일진전기(935억원), 신라젠(1032억원) 등이 유상증자를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대기업과 금융회사를 제외한 중견 기업의 올해 상반기 유상증자액은 1조5000억원 규모다. 평년 대비 크게 늘거나 줄지 않았다. 지난해 중견 기업의 유상증자 규모는 2조7000억원이었다.
IB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과 금융회사의 경우 유상증자를 실시하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야 하고 자금 부담 때문에 지분율만큼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다른 주주 지분율이 늘면서 해당 회사에 대한 지배력(지분율)이 희석된다"면서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대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재무구조 악화에도 불구하고 유상증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전했다.
올해 들어 대기업과 금융회사들은 대부분 유상증자 대신 영구전환사채(CB) 등의 후순위성 증권을 발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CB는 고금리 채권이지만, 만기가 길고 상환 강제성이 일반 채권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유로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된다. CB를 발행하면 증자를 하지 않고도 부채비율을 개선할 수 있다.
최근 SK그룹 계열 이차전지 회사인 SK온이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5000억원 규모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뒤이어 아시아나항공은 증권사들이 보유한 CB를 상환하려고 1770억원 CB를 발행했다.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을 추진 중인 대한항공이 CB를 모두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신세계건설(6500억원), SK인천석유화학(4600억원), 롯데컬처웍스(2000억원), 메리츠금융지주(2000억원), 메리츠증권(1900억원), KB부동산신탁(1700억원), 롯데지주(1500억원), CJ대한통운(1500억원), KB증권(1300억원), CJ CGV(1200억원), 효성화학(1000억원) 등이 올해 상반기에 CB를 발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금융회사들은 CB 외에 코코본드와 후순위채도 유상증자 대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KB, 신한, 하나, 우리, 농협 등 5대 금융지주사와 DGB, JB 등 지방 계열 금융지주사들이 코코본드를 발행해 지주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개선했다. 현대해상, 메리츠화재, 롯데손보, 푸본현대 등의 보험사들은 주로 후순위채를 발행해 지급여력(RBC) 비율을 제고했다.
IB 업계 관계자는 "신용도가 우량한 금융회사와 대기업들은 다소 높은 금리를 부담하더라도 자본 비용 측면에서 저렴한 CB 등을 재무구조 개선용으로 계속 활용할 것"이라며 "후순위성 채권이 발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용도가 악화한 기업들을 위주로 유상증자 시장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