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푸어' 사법부] 현장검증에 개인 돈 쓰는 판사들

출장비 2006년 이후 동결
일부 법원은 공과금 연체도

<i>“현장 검증을 나가면 주말에 일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사비가 더 들기 때문에 망설여집니다.”</i>

최근 판사들 사이 확산되고 있는 ‘현장검증 기피’ 현상은 사법부 예산 문제가 어떻게 일선 재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예산 부족으로 인한 궁핍한 재정 집행이 헌법에 규정된 신속한 재판의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침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출처=법률신문]

법원실무제요 등에 따르면 판사와 법원공무원 등이 재판 당사자들의 주장이나 혐의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현장 출장을 가는 경우 ‘법원공무원 여비 규칙’에 따라 검증여비가 지급된다. 관내 출장이나 거리가 12km를 넘지 않는 경우를 기준으로 여행시간이 4시간 미만이면 1만 원을 준다. 이동시간이 4시간을 넘는 장거리 출장에만 2만 원을 주는데 그나마 관용차량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지급하지 않거나 절반(1만 원)을 깎는다.

문제는 이 규정이 2006년 이후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 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1만 원 남짓한 금액이 지급되는데 함께 현장 검증에 나선 참여관 등과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해도 사비가 더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 검증에 소홀할 수는 없지만, 물가 변동이 반영되지 않은 여비가 허들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공과금이나 수당 등을 제때 못내 이월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권 지역의 한 법원공무원은 “지난해 가을 한 지방법원에서 전기요금을 바로 못내 연체료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 초엔 판사 수당을 못 줘 한달 뒤에 지급한 경우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행사 예산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법원에서 토론회 등을 개최할 때 전국 통합 예산 내에서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각 법원끼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외국 손님들을 모시는 국제 행사라도 예산 문제로 규모를 축소한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돈이 없다고 해서 예산을 법원 마음대로 늘릴 수 없다. 헌법상 예산안 편성과 제출권은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심의·확정권은 국회가 나눠갖고 있다. 판사 출신인 홍대식(59·22기) 서강대 로스쿨 원장은 “한국은 인건비 비중이 높은 지식서비스 기반 업무 부처의 예산 비중이 높지 않은 것이 고질적인 문제”라며 “인공지능(AI) 시대에 법관들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기술 지원도 필요한 만큼 예산 충족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박수연, 한수현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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