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바튼 아카데미'에서 쿤체(브래디 헤프너)는 올러만(이안 돌리)의 장갑 한 짝을 빼앗아 강에 던진다. 털리(도미닉 세사)에게 시비를 건 사실을 교사 허넘(폴 지아마티)에게 고자질해서다. 털리는 씩씩거리는 올러만에게 "일부러 한쪽만 버린 거야. 한쪽만 갖고 있으면 네가 더 짜증 날 테니까"라고 한다. 올러만은 나머지 장갑 한쪽을 강에 버린다. 갑자기 생긴 결핍을 잊기로 한다.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인물들은 따로 있다. 털리는 정신병동에 갇힌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조리사 메리는 아들을 베트남전쟁으로 잃었고, 허넘은 하버드대에서 누명을 써 은신한다. 하나같이 남은 장갑 한쪽을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바튼 아카데미에 발이 묶여 정체된다. 방학 동안 의도치 않게 동고동락한다.
식탁에 모여 앉은 이들 모습은 흡사 가족 같다. 실제로도 비슷하게 변해간다. 허넘은 병원에서 어깨가 탈구된 털리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메리는 높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여동생 집에서 털리의 도움을 받는다. 서로 빈틈을 메우며 끈끈한 연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정통 철학이 추구해온 보편적 진리와 거리가 멀다. 다원화 사회, 개인주의 문화 등의 기초인 개인 간 공감이 우선된다. 개인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공사 분리는 전면화된 지 오래. 더 이상 민주, 공산 같은 개념은 과거와 같은 힘을 쓰지 못한다. 개인들 간 연대가 새로운 공적 가치로 여겨진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저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인류의 연대는 편견을 제거하거나 혹은 감추어졌던 깊은 진실을 캐냄으로써 인식될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것은 탐구가 아니라 상상력, 즉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들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연대는 반성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 내용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이뤄진다."
로티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확대할 동력으로 이론이 아닌 이야기를 가리켰다. 개인의 그것이 상세히 서술되고 공감을 얻어야 연대가 형성되고, 도덕과 정치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허넘이 실천하는 연대도 같은 곳을 바라본다. 털리의 고백에 자기 경험까지 꺼내어 과거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설파한다. "너의 이력으로 너의 운명을 결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렇게 둘은 '그들'이 아닌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새로운 세상에 나아갈 힘을 얻는다. 남은 장갑 한쪽을 고이 간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