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도 불법도 아닌 '낙태'…입법 공백에 혼란 가중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단
2022년 임신중지 3만2063건 추정
국회서 입법 개선 안돼…법 효력 상실

최근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권을 명시한 가운데 '낙태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고, 국회에서 입법 개선이 되지 않아 2021년 법의 효력이 상실된 상태다. 사실상 임신 중단이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상태에 놓이면서 국민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모두의안전한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모임넷)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임신 중단 시술 꺼리는 의사들

18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폭력 피해자 임신 중단 지원 현황과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의사들이 임신 중단을 불법으로 알거나 불법·합법도 아닌 상황을 알고 의료 제공을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 A씨는 “임신 중단이 지금 합법으로 됐느냐”며 “처벌 규정은 없지만 합법도 아닌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의료 현장에선 성폭력 입증, 보호자 동의, 배우자 동의 요건들이 아직도 남아있고 임신 중단 지원 및 자원도 부족한 실정이다. 의사 B씨는 “정부에서 뭔가 뚜렷하게 확신이 없지 않느냐. (기존 관행을 유지하면서) 계속 방어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비범죄화 전과 후가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밝혔다. 의사 C씨는 “임신 유지를 위한 지원과 자원들은 매우 많은데 임신 중지는 연결해드릴 수 없다”며 “제도가 완비되지 않아서 (이전과) 똑같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 통합지원센터인 ‘해바라기센터’의 수탁병원조차도 10곳 중 3곳은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 중단 시술을 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시술이 가능한 곳은 수탁병원 35곳 중 25개소(71.4%)에 불과했고, 나머지 10곳은 외부병원으로 연계해준 것으로 확인됐다. 대부분 병원 지원 절차가 복잡하거나 의사가 거부하는 등의 이유였다.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피해자를 위한 상담·의료·법률·수사 지원을 통합 제공하는 기관이다. 현재 국공립병원에 19개소, 민간병원에 20개소가 설치돼 있다.

임신 중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정보 부족, 의료 기관 접근성, 의료 비용 등을 문제로 꼽았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는 지난달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경험 조사 결과보고서’에서 응답자들은 온라인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확인하기 어려웠고, 병원조차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경험이 있다고 발표했다.

공식 정보가 없어 상담과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임신 4주 차와 9주 차 여성 모두 수술비용으로 80만~100만원 사이를 지불하는 등 의료비 격차도 컸다. 모임넷은 “정부와 보건당국은 임신 중지를 건강권으로 공식적으로 보장하고, 안전한 임신 중지에 관한 포괄적 정보와 의료기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며 “의료보장 체계 구축과 임신 중지 시술 의료수가의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모임넷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임신 중지 권리침해에 대해 진정을 제기했으나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15∼44세의 인공임신중절률은 3.3‰(천분율·퍼밀)로, 1년간 시행된 임신 중지는 3만2063건으로 추정됐다. 연도별로는 2016년 6.9‰·6만9609건, 2017년 4.8‰·4만9764건, 2018년 2.3‰·2만3175건, 2019년 2.7‰·2만6985건이었다. 해당 수치는 당해 시행 건수를 토대로 1000명당 임신중절률을 계산하고, 이를 15∼44세 인구에 대입한 수치다.

◆다양한 대안 제시, 합의 도출 불발

헌재는 2019년 4월 “임산부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1953년 낙태죄가 도입된 지 66년 만, 2012년 재판관 의견 4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린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2020년 12월31일을 입법 기한으로 제시했으나 국회에서는 대체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낙태 허용 기준에 대한 다양한 법안이 나왔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했고, 의원들은 총 6건의 법안을 내놨다. 정부안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여성 본인의 의사에 따라 허용, 그 이후 24주 이내에는 유전학적 질환, 강간·준강간 등 모자보건법상 사유 및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도록 했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 안은 심박동이 감지되기 이전인 임신 6주까지 허용, 그 이후 10주 이내에는 사회적·경제적 사유 등으로 인한 허용, 그 이후 20주까지는 강간·준강간 또는 여성의 건강상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 안은 임신의 지속이 임부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임신기간에 제한 없이 허용하고, 그 이외의 사유는 10주로 제한한다. 권인숙·이은주·박주민 의원 안은 낙태죄 처벌 규정 폐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형법상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조항은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삭제됐다. 다른 의료행위가 법으로 하나하나 명시돼야 합법인 것이 아닌 것처럼 임신 중지 역시 마찬가지”라며 “임신 중지는 오랫동안 병원에서 행해지는 의료행위였다. 현재 필요한 것은 임신 중지를 규제하는 법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건강권 보장을 위한 의료행위로서 어떻게 보건의료체계를 만들 것인가”라고 조언했다.

이어 “임신 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현재 시급하게 이뤄져야 하는 문제는 임신 중지의 건강보험 급여화이다. 실질적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문제이고, 건강보험 급여화가 되지 않는 영역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필수적인 문제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회부 임춘한 기자 choo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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