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의사보다 현명한 국민들, 이번엔 다르다

"나는 내과 교수에게 진료받는 예약을 했기 때문에 전공의가 없어도 관계없다. 하지만 대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미뤄야겠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던지기 시작한 20일, 호흡기질환으로 빅5 대학병원에 외래 예약을 했던 기자의 지인은 "어차피 초진이라 검사만 할 것 같고, 결과도 부지하세월일 텐데 작은 병원으로 가겠다"며 예약을 취소했다.

빅5 병원의 전공의가 오전 6시를 기해 근무를 중단한 20일 서울 한 대형병원 외래 진료 대기공간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다시 벌어지면서, 암 수술을 앞둔 사람 등 수많은 환자가 생명을 잃을 공포에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당장 급한 진료가 필요하지 않은 다수의 국민은 2014년, 2020년 의료파업 때보다 현명하게 대응하고 있다.

과거 의료계 파업시 “환자들은 일주일째부터는 못 버티고 무조건 병원을 열게 하라고 요구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패턴이 전공의들에게 파업하면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줬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엔 환자와 국민들이 과거와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본다. 국민 여론이 전공의 집단 사직에 압도적으로 부정적인데다가, 환자들 스스로 일종의 '트리아지'(어떤 의료기관에서 어떤 치료를 할지 정하는 응급환자 분류체계)를 시행할 만큼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학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며 예약을 취소하고 동네 의원으로 발을 돌린 기자의 지인이 좋은 예다.

이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료계가 몇년마다 총파업을 벌이면서 국민들도 그동안 의료공백에 대처하는 ‘실전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전국민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맞춰 어떤 병·의원을 이용해야 하는지 익힌 학습 효과도 더해졌다고 복지부 관계자는 해석했다.

정부는 전공의 사직에 대처하는 비상진료체계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을 3주까지로 본다. 의료계의 환자 외면이 계속되면 전국민 건강 유지가 불가능해지고, 지금 보여주는 국민들의 현명한 대응도 결국 물거품으로 끝나게 된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가운을 입은 전공의들이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기다리면서 사직서를 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의료계는 정부의 의료 정책에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당연히 갖고 있다. 그러나 의사 표현은 국민이 현명하게 대응하는 동안 국민 곁으로 돌아와서 환자의 손을 잡고 하기 바란다. 이 시기가 지나면 국민은 의료계를 더 기다려주지 않는다.

바이오중기벤처부 오주연 기자 moon170@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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