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대한민국 전체가 골병 들었습니다." 최근 아시아경제에서 만난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노트북, 태블릿PC, 키보드, 마우스 등을 꺼내며 바쁘게 말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빠진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경고하듯 정 교수는 노트북 화면에 고꾸라지고 있는 꺾은선 그래프가 담긴 자료를 띄웠다. 그는 "한국 저출산 문제는 결국 경제 성장과 맞닿아있다"며 "기업이 노동력 수급에 있어 위기가 온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독일의 사례를 참고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국가 주도 성장의 부작용이 저출산 문제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1960년대부터 한국은 산업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면서 개발 독재 기간 동안 국내총생산(GDP)을 30배 가까이 늘렸다. 하지만 사회는 더욱 불평등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순자산 보유 10분위 가구의 순자산 점유율은 2017년 기준 42.1%였지만 지난해에는 43.5%로 늘어났다.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정 교수는 "독재정권이 주도한 개발이었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가 합의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장이었다"며 "하지만 분배 등 가치를 소홀히 한 탓에 합계출산율 1명 이하의 저출산 문제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성장 대신 삶의 질을 찾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아이를 낳는 데 있어 '물질적 문제'와 '삶에 대한 만족도'라는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가운데 '삶에 대한 만족도'라는 축이 흔들려 한국에서 아이 낳기를 포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특유의 초경쟁, 지역 간 불균형, 계층 간 소득 격차 등이 삶의 질을 떨어트렸다"며 "남성에게는 부양 부담, 여성에게는 경력 단절 문제가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삶의 질을 높이지 않고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도 또 다른 부작용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시는 프랑스다.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1994년 기준 1.66명까지 떨어졌지만 이민자들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2013년 2.0명으로 올랐다. 하지만 이민자 차별로 인한 사회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해 6월 북아프리카계 10대 소년 '나엘 메르주크'는 프랑스 파리 외곽의 낭테르에서 경찰의 검문을 거부하고 도주하다가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이에 프랑스 전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과정에서는 방화와 약탈이 이어졌다. 정 교수는 "프랑스로 온 이주민들은 임대주택을 제공받는 등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됐는데도 엄청난 분노에 휩싸여있다"며 "한국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이란 가치 아래 만들어진 국가를 정책 몇 개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의 저출산 대책도 과거 국가 주도 성장 시기와 닮아있다고 짚었다. 정부 부처는 '빨리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단기적인 대책, 즉 현금을 뿌린다는 지적이다. 그 성과 측정마저도 실제 출산율 상승에 대한 기여가 아닌, 얼마큼의 현금이 몇 명에게 지급됐는지 집계하는 식이다. 정 교수는 "아이를 육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일단 결혼적령기의 국민들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며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는 기업의 복지제도도 들여다보면 현금을 뿌리는 국가 주도 정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최우선 과제로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제안했다. 정 교수는 "일과 가정 양립은 저출산 문제의 단기적 대책이다"며 "여성은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 없이 일할 수 있고 남성은 여성만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저출산 문제 해결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기적 대책인 불평등 해소와 연결할 중기적 대책은 '한국 기업 문화의 변화'였다. 정 교수는 "가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기업 중심으로 퍼진 후에야 불평등 문제 등을 건들 수 있다"며 "회사원들이 육아휴직, 유연근무를 사용한다고 사내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중기적 대책을 세우는 데 있어 독일의 저출산 문제 해결법을 참고할 만하다고 조언했다. 독일은 1980년대부터 합계출산율이 1.3명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 만성적인 저출산 문제에 시달렸다. '이미 늦었다'는 회의적인 분위기까지 조성됐다. 만성적인 저출산 형상에 2007년 독일 정부는 부모수당을 지급하는 등 인구 문제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부보다 기업이 저출산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정부는 뒤에서 일과 가정 양립에 힘쓰는 기업에 대한 지원에 힘썼다. 정 교수는 "독일은 과거 나치 때 전쟁에 쓸 인구를 늘리기 위해 국가 주도의 출산을 장려한 적 있다"며 "나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독일 정치인들은 나서서 출산을 장려할 수 없다. 기업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기업들이 직접 나선 것은 노동력에 대한 우려 해소를 위해서다. 저출산 기조가 길어지면서 전문직 등 고급인력이 부족해졌다. 실제 독일은 지난해 기준 이과 계열 전문 인력이 남은 일자리에 비해 약 28만5000명 부족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한계가 존재했다. 독일은 1960년대부터 외국인 노동자 이주정책을 실시해 이주 3세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독일에 적응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이주 3세대임에도 이슬람 문화권의 1, 2세대 부모들이 사회화 과정을 돕지 않아 독일어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어를 못하니 독일에서 전문직을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독일 기업이 채택한 방법은 이미 한국에도 있는, 자유로운 유연근무제와 육아휴직 등이다. 정 교수는 "한국은 부모가 육아휴직을 반드시 쓰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독일은 정반대다"며 "커리어나 돈을 중시하는 사람은 육아휴직을 짧게 쓰고 복귀한다. 중요한 건 아이를 낳은 회사원들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독일 기업은 일과 가정 양립에 집중하고 정부는 뒤에서 지원한 이후, 독일의 합계출산율은 2021년 기준 1.58명까지 반등했다.
한국의 노동력 감소 역시 예정된 사실이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올해 기준 약 3632만8000명이던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10년 뒤인 2034년, 3241만8000명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2039년(2955만2000명)에는 처음으로 3000만명 아래로 떨어지고 2062년에는 1983만4000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2062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수는 1864만7000명으로 생산연령인구 수와 맞먹는다.
정 교수는 노동력 문제 해결에 있어 여성가족부 중심의 노력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여성가족부가 나서서 가족친화인증을 주고 있지만 지난해 기준 인증을 받은 기업은 총 5911곳에 불과하다"며 "전체 기업 수 대비 1%도 안 된다. 이 정도 수치로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대신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참여를 주문했다. 정 교수는 "지금 경제계에서는 인구가 줄어들 경우 내수시장의 축소를 우려하는데 핵심적인 문제는 기업이 수급할 전문 노동력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인공지능(AI) 등 고급 산업을 이끄는 국가가 될지, 다른 나라가 만든 토대에 하청을 담당하는 국가가 될지 기로에 섰다"며 "결국 주체가 나서야 한다. 기업의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