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기자
‘5박 6일 태국 방콕 가족여행, 11년 만에 아내와 단둘이 영화관, 아들 하굣길 나눈 소소한 대화들….’
서울 중구 CJ제일제당에서 근무하는 정성역씨(43·남)가 지난해 2월과 3월 가족과 함께 보낸 2주간 했던 일이다.
직장 생활 17년 차인 정씨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다. 외벌이인 탓에 아내가 돌봄을 주로 전담해왔기 때문이다. 자녀들과 대화할 시간이 생겨도 정작 자녀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지 못해 장시간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정씨는 자신의 지방 근무지 발령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아내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2013년 첫 자녀 해인양이 태어난 뒤 아내는 육아휴직을 쓰기도 했지만, 근무지 변화와 당시 세월호 사고로 사회적 불안감이 대두된 상황 등으로 결국 직장을 포기했다.
정씨가 가족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둘째 수인군(7)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CJ제일제당은 입학기 자녀를 둔 임직원이면 누구나 2주 유급휴가를 포함해 총 4주간 휴가를 쓸 수 있는 ‘자녀 입학 돌봄휴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2017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2022년 기준 남성 187명, 여성 63명, 2021년 각각 195명, 67명이 제도를 이용했다. 최근 HD현대가 2030년까지 여성 채용을 2배로 늘린다고 발표하면서 학령기 자녀를 둔 임직원에게 최대 6개월까지 ‘자녀돌봄 휴직’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직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정씨는 ‘돌봄휴가를 진짜로 써도 될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비슷한 또래 자녀가 있는 동료들과 ‘휴가 때 무엇을 할 것이냐’는 이야기를 자주 나눴고, 1월 초 인사부가 부서장에게 전달한 이메일 덕분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 연초부터 부서 회의 때 정씨의 휴가 일정이 미리 공유됐고 부서원들은 이에 맞춰 업무를 분담했다. 정씨는 “일찍부터 부서장에게 돌봄휴가 관련 정보가 공유되다 보니 부서에서도 이를 반영한다”면서 “누구 아이가 학교에 갈 때가 됐는지를 서로 잘 알고 있어서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가 이처럼 부채 의식 없이 돌봄 휴가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회사 내에 자녀와 관련한 휴가나 휴직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CJ제일제당은 개인 연차도 승인 절차 없이 본인이 올리기만 하면 된다. 이로 인한 일정 조율과 업무 배분은 상위 관리자가 갖춰야 하는 능력 중 하나인 셈이다.
돌봄휴가 2주 중 일주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캠핑으로 1박 2일 정도 근교 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약 일주일간 떠난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행기 타기를 싫어하는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온 가족이 연초부터 나섰다. 사내 해외여행 지원 제도를 통해 숙소도 저렴하게 예약했다.
“저랑 아내는 수영을 못 하거든요. 그래서 아들에게 수영을 가르쳤죠. 매번 아내가 보내주는 동영상으로만 봤었는데, 수영하는 아들을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3월2일 새벽 귀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정씨 가족은 곧바로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했다. 정씨는 “이때쯤이면 월 마감도 해야 하고, 사업 계획도 준비하는 바쁜 시기라 첫째 아이 때는 입학식에 가지 않았다”면서 “아빠들이 입학식에 대체로 가지 않는 분위기도 그렇지만, 스스로 굳이 아이 입학식까지 아빠가 가야 하느냐는 식으로 자기 검열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입학을 앞둔 자녀에게 선물도 보내주고 휴가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정 씨는 “딸이 아들과 똑같은 선물을 달라고 요구해서 애를 먹었다(웃음)”면서 “이직할 때는 몰랐던 제도였지만 덕분에 저도 재충전하고, 가족들과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일주일은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데 썼다. 돌봄 휴가는 2주일을 연달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일주일씩 1회 끊어서도 활용할 수 있다. 정 씨는 “쉬면서 아내와 영화도 보러 가고 같이 쇼핑도 했다”면서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단둘이 영화로 보러 간 날”이라고 기억했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고 나서 집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 날도 있었고, 둘이서만 외출해 쇼핑하기도 했다.
아내를 쉬게 해주고 싶어 며칠은 정 씨가 직접 아들을 학교에서 데리고 와 학원으로 바래다주기도 했다. 정 씨는 “대개 엄마들이 서 있는데, 저 혼자만 서 있으니까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면서 “아들도 자기만 아빠가 와 있으니까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긴 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들이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를 조금 알게 됐다”면서 “학교에서 학원 왔다 갔다 하면서 ‘오늘은 뭐 했니’ 이런 얘기를 하고 방과 후에는 무슨 수업을 듣는지, 앞으로 어떤 운동을 하고 싶은지 이런 얘기들을 나눴다”고 했다.
CJ제일제당은 임직원들의 상황에 맞춰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들을 꾸준히 재정비하고 있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돌봄 휴가 제도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무렵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들이 자꾸만 늘어서 2017년 신설하게 된 것”이라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이지만 남성들도 함께 활용하자 조직 문화나 분위기 변화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체감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