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정기자
"장기간의 구조조정으로 수익구조를 개선한 일본 기업이 미래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친환경·우주개발 분야의 발전 속도가 한국을 크게 능가하면서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본 전문가인 박상준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는 최근 일본 경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중요한 축으로 기업의 수익 개선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올해 일본의 주가가 좋은 것은 양적 완화 때문만은 아니고 기업들의 실적이 좋았던 영향"이라며 "토요타·소니 등 일본 대표기업들의 영업이익이 1조엔을 넘어섰고, 적극적인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개선한 기업들의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올해 상반기만 보면 일본의 전 역사에서(1954년부터) 취업자수가 가장 많다"며 "기업 실적이 좋을 때 취업자수도 좋은데 일본 경제가 완만한 회복 흐름을 보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올해 상반기 일본기업의 수익성 개선과 함께 일본기업의 설비투자가 호조를 보이는 점도 주목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다. 닛세이기초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명목 기준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4.5% 증가한 101조엔에 달하고 내년 역시 3.8% 증가해 105조엔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설비투자액이 100조엔을 넘은 것은 1991년 이후 32년 만이다. 2년 연속으로 100조엔을 초과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2분기 설비투자가 주춤하고 있지만 큰 그림에서 볼 때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 시기 설비투자가 오랫동안 정체됐다는 것을 고려하면 설비투자의 회복세가 장기화할 경우 일본 경제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장상식 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도 "일본의 설비투자 증가는 자국 내 투자로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호실적은 일본 주식 시장에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 올해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지난 6월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33년 만에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역사적 신고가는 1989년 12월 29일(3만8915.9)인데 향후 이를 돌파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전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글로벌 증시가 전반적으로 숨 고르기 장세에 들어갔지만 일본 증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신한투자증권 오한비 연구원은 "일본 주가와 이익 모멘텀 모두 주요국 증시 중 상위권"이라며 "최근 3개월간 이익 모멘텀(3.7%)은 미국 증시(2.2%)도 상회하는 수준으로 이익 모멘텀의 차이는 주가 모멘텀의 차이로 귀결되는 중"이라고 전했다.
일본 증시 호황의 배경에는 일본은행의 완화정책 지속과 엔화 약세 등에 따른 기업실적 개선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는 "코로나19 이후 제조업의 경상이익 증가율이 높은 가운데 주력 수출업종인 전자·기계 업종의 주가 상승세가 뚜렷했다"면서 "포스트 코로나에 따른 펜트업 수요 확대와 외국인 관광객 유입 등에 따른 경기회복 전망, 이례적으로 높은 임금협상 결과 등 일본 경제의 구조변화에 대한 기대도 주가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특히 외국인투자자가 일본주식을 대거 사들이면서 증시를 끌어올렸다. 여기에는 주주친화정책 확대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다. 도쿄 증권거래소가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기업들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면서 3월 결산 이후 다수의 상장기업이 배당 증액, 자사주 매입 확대에 나섰다. 지속적으로 주가자산비율(PBR)이 1배를 하회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경영개선 방안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기업가치 제고에 나선 것도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치투자 대부인 워런 버핏이 5대 상사(미쓰비시, 미쓰이, 이토추, 마루베니, 스미토모)에 투자했다고 알려지면서 투자 심리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오 연구원은 "금융업 제외 일본 기업들의 경상이익과 마진은 올해 2분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며 "기업 실적은 임금 인상 여력을 뒷받침하는데 엔·달러가 높은 수준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고, 미국의 경기 강세로 대(對) 미국지역 중심 수출 호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할 체력을 갖춰가는 중인데 인플레이션 압력에도 이익이 증가하고 마진이 훼손되지 않은 점은 내년 춘투 임금협상에서 임금 추가 인상 기대감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수출 호조 → 임금 인상 →소비 개선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디지털화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이 이 분야에 속도를 내고 있는 점도 달라진 변화 중 하나다. 박상준 교수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투자에 집중하는 분야가 디지털라이제이션과 친환경, 우주, 양자컴퓨터"라면서 "일본 기업이 미래 산업에 적극적인 투자를 시작하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점은 한국 기업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 탈출의 기로에 선 가운데 이지평 교수는 "국제적으로 낮은 금리가 해외로의 대량 자금 유출과 엔저의 가속화라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고 일본기업의 디지털 혁신, 그린 이노베이션을 위한 대규모 투자자금 수요를 충족하면서 새로운 성장 잠재력을 강화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전날 일본의 성장률을 6월(1.3%) 전망보다 0.5%포인트나 올린 1.8%로 상향 조정했다. 한국의 성장률은 직전 전망인 6월과 같은 1.5%로 예측했다. 전망이 현실화한다면 한국 경제 성장률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하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