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전환기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일순간에 바뀌는 건 아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불거진 산업혁명은 과거 수 천년간 이어져 온 인류의 행태를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다고 평가받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수십 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에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지식의 세계에서야 수십 수백 년에 걸친 믿음의 토대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겠지만 인간의 삶은 본디 그러한 변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20세기에 꼽을 만한 공학적 성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1위는 전력망)에 있는 자동차라는 탈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이동의 제약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이루는 데 혁혁한 공이 있다고 평가받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이 이동수단이 처음부터 인류에게 환영받은 건 아니다.

19세기부터 증기기관을 활용한 이동수단이 생겨나 상당한 수준의 기술발전이 이뤄졌으나 당시의 주류 이동수단 마차와 갈등을 겪었다. 당시 영국에서 만들어진 기관차 조례 혹은 붉은 깃발 조례는 말과 마주한 차량은 멈추라거나,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를 내뿜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구시대의 관행을 답습하는 대표 사례라는 평가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대가 내린 것이다. 당시의 눈높이, 시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던 셈이다.

20세기 들어 미국이 컨베이어 시스템 등을 도입해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자동차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보급된 건 아니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발전하는 걸 막으려는 자동차 회사와 석유 회사의 물밑 움직임이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가 생겨나는 변혁의 시기에는 다양한 집단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내세운다.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을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자동차가 인류의 이동권을 신장시켜준 건 얼추 맞는 얘기지만 마냥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근래 이동수단을 둘러싼 변화의 양상 역시 과거 혁명에 버금갈 정도라는 평이 많다. 화석연료를 태운 힘으로 굴러가던 탈 것을 대신해 전기 혹은 그와 비슷하게 유해 물질을 내뿜지 않는 동력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표면적으로는 기후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명분을 든다. 당초 예상보다 전환 속도가 빨라진 건 테슬라로 상징되는 ‘괴짜’, 그리고 G1을 노리는 중국의 입김이 적잖이 작용한 결과다.

전동화 흐름과 함께 자율주행, 스스로 판단해 움직이는 표현 그대로의 자동차도 머지않은 미래라고 본다. 하드웨어로서의 이동수단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주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와 인간, 차와 차끼리 소통하면서 안전하게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간 만들어온 기계와는 전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세기 넘게 가다듬어온 공학 기술을 완전히 다른 쪽 방향으로 바꾸려는 것도 그래서다.

중요한 건 변화 혹은 전환을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서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태도다. 인류가 탈 것을 만들어내고 이런저런 기술을 얹어 자동차를 가다듬은 건 이동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인류를 위한 진보’라는 한 자동차 회사의 슬로건은 단순히 차를 많이 팔기 위한 마케팅 수단이나 레토릭이 아니라 그만큼 본질에 다가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기술 발전을 이끄는 동력을 북돋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다만 변화의 방향이 맞는지, 목적이 적절한지를 꾸준히 되묻는 일도 함께 수반돼야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변화 이후의 삶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해 왔기에 인류는 지금에 이르렀다.

산업IT부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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