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기자
유럽중앙은행(ECB)가 물가와 경기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니 신음하는 경제가 문제고, 금리를 동결하자니 인플레이션 고착화가 우려되면서 ECB의 딜레마가 가중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유럽 경기의 하강 추세가 짙어지고 있지만, 물가 관리에 우선순위를 두고 긴축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31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는 유로존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5.3% 상승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전월(5.3%)과 동률로, 상승폭이 5.1%로 축소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보다 높은 수준이다. 유로존 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0월 고점(10.7%)을 찍은 뒤 내림세로 돌아섰으나 3월 이후 목표치(2%)의 두 배가 넘는 수준에서 맴돌며 둔화세가 주춤해진 모습이다.
당초 시장에서는 ECB가 9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인상 대신 동결 카드를 꺼낼 것으로 예상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도 지난 7월 통화정책회의 이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후속 회의 결정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며 "올릴 수도, 동결할 수도 있다. 향후 금리 결정은 들어오는 경제 데이터에 달렸다"며 추후 동결 가능성을 열어뒀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물가 지표는 동결 가능성을 열어둔 ECB에 어떤 확신도 주지 못했다. 애매한 물가 지표에 시장에서는 ECB가 동결 대신 금리 인상을 이어갈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단스케방크의 수석 전략가인 피에트 크리스티안센은 "전반적으로는 디스인플레이션 과정이 진행 중에 있지만, ECB가 물가 안정을 확신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며 "ECB가 오는 9월 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8월 CPI는 내달 14일 열리는 통화정책회의 전 마지막 물가 지표라는 점에서 ECB 정책 향방에 결정적인 변수로 꼽힌다.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등 유로존 주요국들의 물가 우려는 여전히 걷히지 않는 상황이다. 이날 발표된 독일 CPI는 6.4%를 기록하며 유로존 평균보다 높았다. 프랑스는 5.7%로 전월보다 0.6%포인트 상승했고, 스페인도 2.4%를 기록하며 전월 대비 0.3%포인트 올랐다. 스페인은 유로존 국가 중 인플레이션이 낮은 편에 속하지만 최근 들어 상승률이 가속화되고 있다.
ECB의 금리 행보에 변수로 꼽히는 근원물가 상승률은 5.3%로, 전월(5.5%)보다 소폭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서비스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너지 식료품)에서 물가 압력이 둔화하면서 근원물가 압력도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 외신은 "근원물가가 소폭 하락한 건 긍정적 지표이나 인플레이션 고착화 가능성이 여전하고, 침체 우려가 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ECB의 고심이 거듭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2분기 반등하는 듯했던 유로존 경제는 부진이 심화하는 모습이다. 의존도가 높은 중국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입은 독일을 비롯해 유로존 국가들의 경기는 악화일로다. 유로존 종합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7.0을 기록해 전월(48.6)과 시장 예상치(48.5)를 크게 하회했다. 이로써 54.1를 기록한 4월 이후 5개월 연속 하락했다. 시장에서는 2분기 일시적 반등 이후 3분기에 다시 둔화 흐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7~8월 PMI를 고려하면 3분기 마이너스 경제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ECB는 올해 경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0.9%로 제시했다는 이는 경제학자들의 예상보다 낙관적인 수치다.
ECB는 지난해 7월부터 9차례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지난 7월 통화정책회의에서도 기준금리를 4.25%로 올렸다. 4.25%의 현 기준금리 수준은 2001년 유로화 출범 이후 최고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