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소도둑이 늘고 있다…금융사 조직문화 되짚어야

"불쌍한 베어링스. 그러게, 사람을 잘 써야지."

1999년 개봉한 영화 '갬블(원제 Rogue Trader)'에서 주인공 닉 리슨이 대규모 금융사고를 일으킨 후 도피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대사다. 이 영화는 1995년 베어링스 은행 파산을 부른 동명의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한다. 리슨이 '바늘 도둑'에서 은행을 파산케 한 '소 도둑'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를 건조하게 드러낸다. 성공하고자 하는 리슨 개인의 욕망, 이를 부추기는 회사의 실적 지상주의와 막대한 성과급, 이로 인해 무시되는 내부통제는 그를 파멸로 이끈다.

최근 국내 금융권도 잇따른 '소 도둑'의 출현으로 시끄럽다. 지난해 우리은행의 한 직원이 700억원대의 횡령 사고를 내더니, 최근엔 경남은행에서 부장급 직원이 560억원대의 자금을 빼돌려 업권을 충격에 빠뜨렸다. 꼭 크고 작은 횡령이 아니더라도 금융권은 각종 불완전판매 등 금융사고로 수년간 홍역을 치르고 있다.

금융권은 내부통제제도를 개선하고 감사시스템을 강화하는 등 방패 마련에 분주하다. 금융사 임원이 사고 발생 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회사지배구조법 개정안도 준비되고 있다. 실제로 각 사건에서 드러난 국내 금융권의 내부통제 및 감사시스템엔 구멍이 많다.

하지만 법과 제도란 방패 강화만으로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리슨을 비롯한 숱한 '소 도둑'의 사례가 보여주듯 통제되지 않은 욕망은 어떤 방식이든 방패를 무력화한다. “시재금에서 수천만원, 수억원을 횡령하는 것도 심각한데, 한탕주의의 영향인지 날이 갈수록 사고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이 걱정스럽다"는 당국 관계자의 넋두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만큼 법과 제도(내부통제시스템)를 충실히 뒷받침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 개선에 대한 고민이 시급하다. 개인 또는 조직 차원에서 직업윤리를 준수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 실적이나 개인의 성과급만큼 준법이 중요하다는 문화, 상호 견제·감시가 자유로운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방패를 향하는 칼도 무뎌질 수 있다.

경제금융부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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