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슬기나특파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년 여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지난해 3월 이후 10연속 금리를 끌어올린 Fed가 예상대로 이번 주 '매파적 동결((hawkish skip)'에 나설 것이 확실시된다. 다만 주거비 등 서비스 물가가 여전히 끈적한데다 노동시장 과열도 식지 않고 있어 향후 긴축 속도를 둘러싼 Fed의 고심도 지속될 전망이다.
13일(현지시간) 미 노동부에 따르면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4.0% 올랐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문가 예상치에 부합하는 수치다. 직전 달인 4월 상승폭(4.9%)보다 낮아진 것은 물론, 2021년3월 이후 2년2개월만에 최소 상승폭을 기록했다. 5월 CPI는 전월 대비로도 0.1% 오르는 데 그쳐 인플레이션 압력이 둔화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 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 역시 전년 대비 5.3%, 전월 대비 0.4% 상승해 예상치에 부합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직후 성명을 통해 "희소식"이라며 "실업률이 역사적인 최저 수준을 유지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는 지속적인 진전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연간 인플레이션은 2021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며, 작년 6월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인플레이션이 11개월 연속으로 하락했다"고 강조했다.
품목별로는 에너지 가격의 낙폭이 두드러졌다. 에너지 가격은 한달새 3.6% 하락했다. 같은 기간 연료유 가격과 휘발유 가격은 전월 대비 각각 7.7%, 5.6% 떨어졌다. 항공료(-3.0%), 육류(-1.2%), 유제품(-1.1%) 가격도 내렸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보복 소비'가 완화되면서 항공료, 호텔숙박료가 진정되는 등 인플레이션 완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주거비를 비롯한 서비스 물가는 여전한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혔다. 주거비는 전월 대비 0.6% 올라 직전월(0.4% 상승)보다 오름폭을 키웠다. 1년 전 대비로도 8.0% 상승했다. 교통 서비스는 전년 대비 10.2%, 전월 대비 0.8% 뛰었다. 연초 하락세를 나타냈던 중고차와 트럭 가격도 4.4% 치솟았다.
2년2개월만에 최저 수준으로 완화된 CPI 상승률은 1년 이상 이어진 Fed의 통화긴축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시그널로 읽힌다. 인플레이션 인사이트 LLC의 오마르 샤리프 사장은 투자자 메모를 통해 "이는 다음달부터 근원 CPI도 실질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좋은 신호"라고 평가했다. 매크로폴리시 펄스펙티브의 로라 로스너-워버튼 수석이코노미스트는 "Fed 당국자들이 (예상에 부합한 CPI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CPI 보고서 내에 고무적인 소식과 실망적인 소식이 모두 포함돼있다고 진단했다.
시장에서는 Fed가 다음날 금리 동결 결정을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이 한층 강화됐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이날 오전 연방기금(FF) 금리 선물 시장은 6월 금리 동결 가능성을 96%가량 반영 중이다. 전월 79%대에서 더 뛰면서 이제 동결을 확실시하는 분위기다. 반면 0.25%포인트 인상 가능성은 4% 안팎까지 내려갔다.
프린서펄 에셋매니지먼트의 시마 샤 글로벌수석전략가는 "Fed가 6월에 금리를 인상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수준으로 깜짝 인플레이션 반등이 확인됐어야 했다"며 "예상치에 부합하는 CPI로 이러한 압박은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코메리카은행의 빌 애덤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Fed가 내일 금리 인상을 보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월가 안팎에서는 Fed가 이달 금리 결정을 건너뛰면서 7월 인상을 예고하는 이른바 ‘매파적 동결’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꼽혀왔다. 10연속 인상을 통해 기준금리를 5~5.25%까지 끌어올린 Fed는 앞서 5월 FOMC에서 통화정책결정문 내 ‘추가적인 정책 강화(policy firming)가 적절하다’는 문구를 삭제하면서 동결이 가까워졌음을 시사한 상태다.
전날 공개된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은)의 1년간 기대인플레이션율(4.1%) 역시 약 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며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실었다. 누적된 긴축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인상을 멈추고 경제 상황을 살필 때라는 당국자들의 발언에 인플레이션 지표까지 뒤따라 준 셈이다. 이날 CPI에 이어 다음날 오전에는 도매물가 격인 5월 생산자물가지수(PPI)도 공개된다.
아이셰어 인베스트먼트 스트래티지 아메리카의 가르기 차우두리 책임자는 CNBC에 "Fed가 (누적된 긴축)효과를 관찰하기 위해 ‘일시 중지’ 대신 ‘건너뛰기(skip)’ 방향으로 갈 것"이라며 "2023년 말까지 최소한 한번의 추가인상을 예고함으로써 최대한의 옵션을 확보하려할 것"이라고 매파적 동결 전망을 지지했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의 안나 웡 이코노미스트는 "5월 CPI는 Fed가 6월 인상을 건너뛸 수 있는 여유를 준다"고 평가했다.
다만 여전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잇따른다. 특히 전문가들은 여전히 높은 근원 CPI, 과열된 노동시장 등을 언급하며 Fed의 긴축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피치의 브라이언 콜턴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휘발유가 하락으로 설명되는 헤드라인 CPI의 급락에 속지 말라"면서 "근원 CPI는 여전히 완고하게 높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품가격이 다시 오르고 임대료 상승이 지속되면서 Fed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Fed 뉴욕연은 출신으로 현재 바클레이즈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마크 지아노니는 "Fed가 할 일이 많다"고 평가했다. 이달 동결 전망을 제시한 웡 이코노미스트도 "근원 CPI의 느린 진전은 Fed가 올해 금리 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 지를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제롬 파월 Fed 의장 역시 다음날 금리 동결을 발표하더라도 이르면 7월 인상이 가능하다는 방침을 시사하며 강한 매파 색채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금리 선물시장에도 이달 동결에 이어 다음달 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이 60%이상 반영돼있다. 앞서 호주와 캐나다 중앙은행도 금리 동결 전망을 깨고 깜짝 인상에 나선 바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만큼 통화정책 결정의 어려움이 더 커졌음을 시사한다는 평가다. 과거 Fed에 몸담았던 제레미 스테인은 WSJ에 "경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에 실수하기 쉬워졌다"며 "통화정책 실수를 저지를 리스크가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인 윌리엄 잉글리시는 "만약 당신이 다음 회의에서 인상을 강행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추가 인상을 지지했다.
투자자들의 눈은 다음날 오후 파월 의장의 기자회견과 점도표, 경제전망 수정치 등에 쏠린다. 이를 통해 향후 통화정책 향방을 가늠하고자 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점도표 내 연말 금리 전망치가 기존 대비 얼마나 높아질지가 관건이다. 상향 수준만큼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앞서 Fed는 3월 점도표에서 올해 말 금리 전망치 중앙값으로 5.1%를 제시했고, 미국의 금리는 이미 그 수준에 도달한 상황이다.
한편 이날 뉴욕증시는 금리 동결 전망이 강화되며 안도 랠리를 펼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블루칩으로 구성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전장 대비 0.57% 오른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대형주 중심의 S&P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 역시 각각 0.6%대 상승폭을 기록 중이다. 시장의 변동성을 보여주는 ‘월가의 공포지수’ 변동성지수(VIX)는 14.65선까지 떨어져 장기 평균인 20을 밑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