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슬기나특파원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對)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중국에 생산공장을 둔 한국과 대만 기업에 대해서는 오는 10월로 만료되는 규제 유예 조치를 연장하기로 했다. 11월부터 중국 현지에서 생산 차질이 불가피했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로선 당장 발등의 불은 껐다는 평가다.
12일(현지시간)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앨런 에스테베즈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은 지난주 산업계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및 대만기업에 적용된 수출 통제 유예 조치를 당분간 연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작년 10월 반도체 및 생산장비의 대중 수출을 막기 위한 통제 조치를 시행하면서, 이미 중국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에게는 예외적으로 1년간 유예기간을 줬다. 이에 따라 오는 10월 유예 조치가 종료되지만 에스테베즈 차관이 산업계 인사들에게 조만간 해당 유예 조치를 갱신한다고 확인한 것이다. WSJ는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미국의 보복 없이 중국에서 기존 반도체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앞서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지난달 기자 간담회에서 해당 규제와 관련 "10월 후에도 상당 기간 (유예가) 연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결정은 글로벌 산업계가 고도로 통합돼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첨단 기술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예상보다 어렵다는 점을 미 당국이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해외 반도체 기업을 비롯한 다수 기업이 미국의 수출규제 조치를 영업 간섭으로 인식하고 강력하게 반발해온 점 등도 영향을 미쳤다. WSJ는 미국과 해외 반도체 기업, 아시아와 유럽 정부가 해당 규제에 저항해왔으며, 가장 큰 비판은 중국이 가장 큰 수출시장인 한국에서 나왔다고 짚었다.
특히 에스테베즈 차관의 발언은 최근 미 의회 등에서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을 제재한 것을 계기로, 한국 기업이 마이크론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도록 수출통제 유예 조치를 살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제기된 가운데 나와 눈길을 끈다. 다만 상무부, 삼성전자 등은 이번 보도와 관련 논평은 하지 않았다.
현재 미 정부는 중국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한국기업에 대해선 별도의 장비 반입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는 상태다. 기준 마련에 상당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한시적인 유예 조치를 연장한 후 기준을 구체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 정부 역시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이러한 기업들의 요구를 상무부에 전달,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공개된 수출 통제안은 미국 기업이 중국 기업에 ▲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16nm 내지 14nm 이하) ▲ 18n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 등을 판매할 경우 허가받도록 한 것이 골자다. 외국 기업의 경우에도 미국의 반도체 장비 및 기술을 중국에 들일 경우 허가를 받도록 했다.
반면 미 일각에서는 이러한 유예 연장이 중국의 기술 발전을 늦추기 위해 고안된 미국의 수출 통제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데릭 시저스 미국기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WSJ에 “두 거대 기업(삼성·TSMC 등)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되면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며 “(통제가) 매우 약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마르코 루비오 공화당 상원의원 등은 지난달 30일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반도체를 비롯한 기술 수출과 관련한 미국의 통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