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컬처]내 마음 속 '공포영화 1위'

어떤 공포영화보다 두려운 현실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 결정에
무력감과 불안감 교차하는 요즘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충분히 매운 음식들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더 매운 음식을 찾아 헤매고 매운 순서대로 자기 나름의 순위를 매긴다는 거다. 공포영화 팬들도 마찬가지. 늘 더 무서운 영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순위를 매긴다. 심령물부터 슬래셔 무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공포영화에 탐닉하는 나도 그렇다. 나만의 공포영화 순위는 꽤 자주 바뀌는 편인데, 최근 10년 사이 ‘유전’과 ‘미드소마’ ‘컨저링’ 같은 영화들이 리스트에 진입했다. 그런데 1위만큼은 수십 년째 변함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1973)’. 나는 아직도 이 영화보다 더 무서운 공포영화는 보지 못했다.

올해 드디어 ‘엑소시스트’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작품이 나타났다. 심지어 신작도 아니고 몇 년 전에 본, 아예 후보군에도 없던 작품인데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순위가 치솟았다. 2019년에 HBO에서 선보인 5부작 시리즈 ‘체르노빌’이다. 1986년 소련에서 일어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참사를 다루었으니 명백히 실화 재난극인 이 작품이 내 머릿속에서 공포 장르로 바뀐 이유는 후쿠시마 오염수(오염처리수) 방류 결정 때문이다. 안다. 내가 이런 식의 칼럼을 천편 쯤 쓴다고 해도 방류 결정은 바뀌지 않겠지만 그래도 쓴다.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쓴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의 학자들밖에 없다. 언론에서는 전문가들의 주장을 쉬우면서 불완전한 표현으로 바꿔 전할 뿐이고, 전문가들조차도 실제 후쿠시마 오염수를 보거나 그것으로 실험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다. 평생 관련 분야를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제각각이다. 정화 처리된 오염수는 괜찮으니 직접 마시겠다는 사람도 있고, 우리가 우려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류됐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일본 정부의 결정은 행정조치가 아니라 실험이다. 자국민은 물론이고 이웃인 우리 국민 그리고 결국 인류의 건강을 담보로 한 실험.

공교롭게도 체르노빌 폭발 사고도 실험 때문이었다.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실험을 감행했고 그 어이없는 과정과 참혹한 결과를 담아낸 드라마가 HBO 시리즈 ‘체르노빌’이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광활한 지역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남아있다. 땅은 흐르지 않지만 바다는 흐른다. 오염된 땅은 피해 다니면 되지만 오염된 바다는 어떻게 피할까? 광우병 사태처럼 그저 기우에 그칠 수도 있지만 생태계에 끼치는 악영향이 예상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인근 국가의 암 발생률이 급등한 것처럼 인과 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2차, 3차 피해가 뒤늦게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일본 정부에 보상받을 길은 있을까?

30년 동안 막대한 양의 오염 처리수를 바다에 쏟아붓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실험이 곧 시작된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실험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무력감과 불안감이 자꾸 커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 마음속 공포영화 1위 자리는 곧 바뀔 것 같다.

이재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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