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원기자
내년도 최저임금을 둘러싼 노동계와 경영계의 신경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노동계는 "냉면 가격도 1만원이 넘는 시대"라며 최저임금을 1만2000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경영계는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이 임대료, 서비스, 음식 가격 등을 모두 올려 영세 사업자와 서민들의 부담만 더 키울 것이란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에 부정적인 것은 당연하다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을 결정한 뒤에도 오른 임금이 우리 물가와 고용, 경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다음 해 최저임금을 정할 때 근거 자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서울 중구 '을지면옥'의 메뉴판
20일 경영계와 노동계에 따르면, 최저임금은 내년 우리나라 물가와 고용, 경기에 영향을 미칠 주요 변수로 꼽힌다. 특히 내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시간당 '1만원' 돌파가 유력하기 때문에 물가안정을 우선시하는 한국은행과 경제 당국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최저임금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경제학자들과 노동계의 의견이 엇갈린다.
강승복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이 2015년 발표한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최저임금이 10% 인상되면 전체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약 1% 상승하고, 물가는 약 0.2~0.4% 오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교수와 전병힐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2020년 발표한 보고서를 살펴봐도 최저임금이 1% 상승할 때 물가는 0.07% 상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송 교수는 보고서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물가상승이나 일자리 상실 같은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며 "완만히 상승시키되, 준수율을 높이는 것이 최저임금에 영향을 받는 근로자의 임금상승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 나온 최저임금과 물가의 상관관계 논문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조나단 워즈워스 런던대 교수가 2010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식당, 테이크아웃 식품, 호텔 서비스 등 저임금 근로자가 많은 산업은 최저임금 도입 이후 다른 산업보다 가격이 연평균 0.5∼2%포인트 더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라 레모스 레스터대 교수가 2008년 최저임금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기존의 연구들을 검토·비교한 결과, 대체로 기존의 연구은 미국의 최저임금이 10% 상승할 때 식품 가격은 4% 이상, 전체적인 가격수준은 0.4% 이하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시민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반면 노동계는 최저임금이 물가에 부정적이라는 것은 경영계의 '프레임'이라는 입장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지난 4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최저임금이 10% 오를 때 물가 인상에 미치는 영향이 0.4~1% 내외라고 조사됐다"며 "역대 가장 큰 폭으로 최저임금이 올랐던 2018년에는 (오히려) 가장 낮은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추세적으로 보면 최저임금 인상률이 높았던 해에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꼭 높았던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추진으로 인상률이 16.4%를 기록했던 2018년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5%에 불과했다. 또 최저임금 인상률이 10.9%였던 이듬해에도 물가상승률은 0.4%로 낮았다.
특히 노동계는 최저임금 인상률은 저임금 근로자의 생계를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지난 18일 권순원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사퇴 촉구 기자회견에서 "냉면 한그릇을 먹었는데 1만1000원이더라. 평양냉면은 더 비싸다"며 "한 시간 일해서 냉면 한그릇 못 먹는다. 25% 인상(1만2000원)도 솔직히 모자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물가에는 금리나 환율, 유가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지만 임금 역시 중요한 변수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국노동연구원장을 지낸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는 "임금이 오르면 물가에 영향이 있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초"라며 "경제 전체를 생각한다면 서로 절제가 필요한데 지금은 (노동계와 경영계의) 불신이 너무 심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내년에는 올해보다 물가가 가라앉고 성장률은 올해가 1%대이니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며 "노동계는 그동안 물가가 많이 올랐으니 대폭 인상을 요구할 텐데 경총에서는 자제를 해줬으면 한다는 입장이어서 협력이 잘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4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양대노총 소속 조합원들이 2024년 적용 최저임금 노동계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한은도 가파른 임금 상승이 물가와 경기에 부정적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은은 지난해 7월 '우리나라의 물가-임금 관계 점검'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최근 연도의 물가상승률은 다음 연도 임금상승률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고, 임금상승은 인건비 비중이 높은 개인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고금리와 경기 불황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도 문제다.
국내 은행이 보유한 중소기업 부실채권 규모는 지난해 4분기 1조7000억원으로 한 분기 사이 41% 늘었고, 자영업자 대출도 지난해 말 기준 1000조원을 훌쩍 넘겼다. 경영계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과 소비를 악화시켜 경기침체를 더 가속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경제 상황에 적합한 수준으로 최저임금 인상률을 결정하기 위해선 보다 구체적인 자료 조사와 분석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임무송 인하대 지속가능경영학전공 초빙교수는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까지는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정해지고 나면 잊어버리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며 "최저임금이 실제 저임금 노동자나 구직자들의 고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총 노동시간이나 소득을 줄이지는 않았는지 등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