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데믹 한달]①안전자산에 뒤통수 SVB…도덕적 해이 CS, 억울한 피해 DB

금리인상에 따른 안전자산의 배신
SVB, 분산투자 원칙 못 지킨 대가
CS, 시장 불신에 곪았던 상처 터져
…DB, 심리적 전염

편집자주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시작돼 유럽 크레디스위스(CS)를 무너뜨리고 도이체방크까지 뒤흔든 글로벌 뱅크데믹(은행+팬데믹)이 발생한 지 한 달을 앞두고 있다. 세 은행은 마치 전염병이 퍼지듯 급작스러운 위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였다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위기의 근본 원인이나 책임에 있어서는 저마다 다른 면모를 보였다. 고금리 속 안전자산의 배신이 뱅크데믹의 근본적 원인으로 꼽히지만 내부통제 미흡, 비이성적 공포의 확산, 모바일 뱅킹을 통한 초고속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도 사태를 키웠다. 다만 실시간 뱅크런, 시장의 비이성적 공포 등 특징적인 현상이 공통적으로 발생하면서 급속도로 은행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전염병이 번지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각국의 신속한 대응 속에 현재 위기의 전이는 멈춘 듯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월가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4일(현지시간) 공개된 연례 주주서한을 통해 최근 은행권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향후 몇 년간 경제 전반에 여파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다.

뱅크데믹 중심에 선 3개 은행은 각기 다른 이유로 파국을 맞았다. 부실자산 투자 실패나 도덕적 해이로 위기를 자초한 은행이 있는가 하면 소문과 우려, 공포만으로 순식간에 붕괴 직전까지 몰리는 등 위기의 양태는 각양각색이었다.

'안전자산의 배신' SVB 파산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은행 위기의 진앙이 된 SVB를 놓고 금융권에선 사실상 금리인상의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와 함께, '안전자산의 배신'의 대표적인 예가 됐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초우량자산인 미국 국채에 대규모로 투자했던 게 금리인상과 겹치며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부른 '살찐 고양이(월가)'들이 부실자산에 대한 무리한 투자와 도덕적 해이로 위기를 불러일으킨 것과는 다른 점이다.

SVB는 코로나19발(發) 양적 완화로 예금이 밀려들자 안전자산인 미 국채에 대거 투자했다. 당시 은행권의 대체적 투자 흐름이었다. 미국 은행의 국내 예금이 2019년 말~2021년 말 38% 늘어나는 동안 대출은 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은행들은 다른 투자처를 찾아야 했다. 이 기간 은행들이 택한 것은 미 국채였다. 미 국채 보유량은 같은 기간 53%나 늘었다.

안전자산이 파산의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해 시작된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강도 긴축이 큰 역할을 했다. 은행들은 Fed가 고강도 긴축을 오랜 기간 진행할지 예측하지 못했다. 금리인상으로 SVB가 보유한 미 국채 가격이 하락하자, 주요 고객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자금을 빼내기 시작했다. 특히 SVB가 예금 반환을 위해 막대한 손실에도 미 국채를 매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뱅크런이 터졌다. 파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블룸버그는 "SVB 붕괴는 세계에서 가장 선호되는 안전자산이 무위험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며 "Fed는 역사적으로 큰 충격 없이 통화정책을 바꾸는 데 뛰어나지 않다. SVB가 증거물 1호다"라고 짚었다.

SVB 자체적으로는 단기예금으로 조달한 자금을 장기채권 자산에 투자하면서, 만기 미스매칭(불일치)을 내버려 둔 것이 위기로 이어졌다. Fed의 긴축에도 지난해 내부적으로 금리인하에 베팅한 오판과 안이한 상황인식도 파산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익 극대화 관점에서 평가하면 '제로(0)금리' 정책이 상당 기간 이어질 거란 전망 속에 SVB의 자산보유전략은 일정 부분 합리적"이라며 "상당히 안정적인 대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었지만 모든 계란을 한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분산투자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비용은 너무나 컸다"고 평가했다.

'예견된 위기' CS…도이체방크는 '날벼락'

SVB 파산의 불똥은 유럽으로 튀었다. 스위스 2위 은행인 CS는 무너졌다. 도이체방크는 주가가 급락하고 부도 위험이 치솟았다. 하지만 위기의 책임으로만 보면 두 은행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CS가 누적된 도덕적 해이와 투자 실패로 위기를 자초했다면, 도이체방크는 탄탄한 수익성과 은행 건전성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대한 공포만으로 혼란의 중심에 섰다.

유럽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167년 역사를 자랑했던 CS의 몰락은 그간 곪은 상처가 터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SVB 사태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란 것이다. CS는 최근 수년간 자금세탁, 법적 분쟁, 투자 실패 등으로 시장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수십년간 부패, 마약밀매, 독재와 관련된 범죄자의 자금 관리를 해왔다는 내부 고발로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불가리아에선 마약상들의 자금세탁을 허용해 지난해 유죄 판결까지 받았다. 2021년엔 영국 그린실캐피털과 아케고스캐피털에 투자해 각각 27억달러, 55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 결과 CS 고객들은 급기야 지난해 연말 대규모 예금 인출에 나섰다.

반면 도이체방크는 재무 건전성이나 투자 포트폴리오에 큰 문제가 없었다. 뱅크데믹 공포 속에 다음 타깃을 찾는 시장에 의해 선의의 피해자가 됐다. 도이체방크의 지난해 순이익은 50억 유로로 1년 전보다 무려 159% 증가했고,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도 142%로 풍부한 편이었다. CS 매각 과정에서 휴지 조각이 된 신종자본증권(AT1·코코본드) 발행액이 상당했고 붕괴 조짐이 있는 상업용 부동산 투자 비중이 높긴 했다. 그래도 은행 건전성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도이체방크는 CS가 아니라 수익성이 좋은 은행이다"라고 강조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최근 도이체방크에 대한 시장 반응은 다소 비이성적이라는 게 해외 시각"이라며 "상업용 부동산 노출, 미국 법무부 조사 등 악재는 있지만 가격 변동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하다"고 분석했다. 미 자산운용사 뱅가드의 사라 데브뢰 채권 글로벌 헤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목격했던 '진정한 시스템적 전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 전염'에 훨씬 가깝다"고 평가했다.

국제1팀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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