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별안간 날아든 암 선고, 이어진 악성 림프종 판정. 금속공예가 서도식은 지난 8년간 병마와 싸우며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었다. 항암기간 중 몸의 근육은 빠져나가고 시력은 점차 악화됐다.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공예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그에게 작업은 이제 먼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치료를 마친 작가는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매일 4시간씩 은판과 동판을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그에게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되니 작업은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는 내리치는 힘이 부족해 그저 맞닿는 정도의 힘으로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여섯 개의 금속 달 항아리가 탄생했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진행되는 서도식 작가의 개인전 ‘Find your light’는 지난 1년 간 그가 걸어온 수행의 소산이다. 여섯 점의 금속 달항아리와 아홉 점의 달항아리를 표현한 부조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를 앞두고 그는 “빛을 찾아서, 그리고 나를 찾아서 몰두한 시간과 그 과정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평균 1만 번 가까이 망치질을 통해 그가 만들어낸 달항아리는 도자기 못지않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자태를 뽐낸다. 가로세로 60cm, 두께만 1cm 이상의 은판을 특별 주문해 망치로 두들겨 가장자리부터 구부린 뒤 원형의 형태를 잡아나가는 과정은 끝없는 두드림이 수반된다. 서 작가는 “하루 꼬박 4시간씩 은판을 두드리는 작업을 반복했다”며 “항암치료 중 근육이 약해진 탓에 의사도 작업을 말렸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작업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웃어보였다. 그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 근육이 붙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깊은 터널과 같았던 투병기간은 그에게 작업을 넘어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를 선사했다. 40년 넘게 서울대 강단에 서며 교육자로 또 작가로 활동한 그는 지난 2월 정년퇴임 후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서 작가는 “제 작업이 금속을 두드리고 곡면을 올리는 작업이다 보니 소음이 심해 학교에선 동료 교수들의 항의가 이어져 제대로 작업하기가 어려웠다”며 “그래서 아예 산업단지 내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원 없이 창작에만 매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엄청난 소음과 체력을 요구하는 작업에서 그는 소음기도 끼지 않고 두드릴 때 나는 소리에 집중하며 그 곡면을 올리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만 번 이상 두드리는 과정에서 그 표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소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손끝으로 표면을 만지고 소리에 집중해 질감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는 왜 자신이 오랫동안 신념처럼 고수해온 철저한 계획, 정교한 디테일로 대변되는 수공기술을 내려놓고 풍만한 항아리에 집중하게 됐을까. 작가는 “항아리가 갖는 풍성한 양감, 그 볼륨감이 메마른 내 마음을 풍족하고 따뜻하게 만들더라”며 “각지거나 금속 판재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려는 내 작업 모토에 맞게 은판과 동판을 부드럽게 감아올려 곡면 형태의 항아리를 만들자 그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됐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비로소 마주한 빛,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서 작가는 “내가 존경하는 유기장 이봉주 선생님은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작업장에 후배들보다 일찍 출근하셔서 수천 번 놋을 두드려 방짜 유기를 만드시는데, 나도 작업에 더 열심히 집중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되더라”며 “과거의 내가 형식과 규격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자유로운 표현이 돋보이는 주제로 확장해서 소재도 다양하게 이번 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오브제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고 밝혔다.
전시는 오는 6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진행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