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슬기자
사진=JTBC(이하)
[아시아경제 이이슬 기자] "역사 왜곡과 민주화운동 폄훼 우려는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오해 대부분이 해소될 것이다."
알고보니 임수호(정해인)가 외계인이라도 되는 걸까. 종합편성채널 JTBC가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에 '오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첫 방송 후 사흘 만에 내놓은 공식입장은 문제의 본질을 짚지 못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JTBC는 21일 "'설강화' 방송 공개 이후,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탕으로 논란이 식지 않고 있어 입장을 전해드린다"며 공식입장을 밝혔다.
이어 "'설강화'의 극 중 배경과 주요 사건의 모티브는 군부정권 시절의 대선 정국이. 이 배경에서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북한정권과 야합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며 "‘설강화’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던 이들의 개인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창작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설강화'에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은 지난 1, 2회에도 등장하지 않았고 이후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JTBC는 "현재 많은 분이 지적해주신 ‘역사 왜곡’과 ‘민주화 운동 폄훼’ 우려는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오해 대부분이 해소될 것"이라며 "부당한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억압받는 비정상적인 시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했다.
이어 "회차별 방송에 앞서 많은 줄거리를 밝힐 수 없는 것에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JTBC가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콘텐트 창작의 자유와 제작 독립성"이라며 "JTBC는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JTBC는 문제의 본질을 짚지 못하는 모양새다.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다. 당장 상황을 면피하고 어떻게든 방영을 이어갈 요행이라면, 최소한의 사과가 담겼어야 하지 않을까.
논란의 핵심을 비껴간 겉핥기식의 유체이탈 공식입장문으로 당장 방송을 앞둔 3회를 송출 할 수 있겠지만, 다수를 납득할 만한 전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시간끌기용'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후 JTBC가 선보이는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설강화'는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30만 명 이상이 서명하며 방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단지 1~2화의 몇 장면을 문제 삼거나, 불편해서 못 보겠다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제작진은 지난 3월부터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 "방송을 보고 말해달라"던 '설강화' 측은 2회 방송 이후 논란이 거세자 더 지켜보라는 식의 입장을 반복했다.
이미 방송된 분량의 민주화운동 폄훼와 안기부 미화가 문제로 지적된 것에 관한 언급이나 사과는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등장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극 설정 자체가 폄훼로 지적되는데도 더 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해명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참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시대를 지우고 두 주인공의 만남과 서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주인공의 참여 여부와 별개로, 여성 주인공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민주화운동에 가담하는 모습이 나왔으며, 시위 장면, 거리 위 안기부 모습 등 80년대 시대 배경이 직접적으로 묘사돼 극을 형성하고 있다.
'설강화'는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1980년대 대선 정국이 배경이다. 그러한 배경을 '가상'으로 구분 지어 볼 수 없는 이유는 당시 군부의 억압과 반공 이데올로기 속 수많은 청춘의 희생과 아픔, 그로 인해 여전히 고통 받는 피해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JTBC는 '반전'이 있다고 했다. 반전이라면 간첩 임수호(정해인 분)가 알고 보니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로 변신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30년 후로 점프해 중년이 된 임수호와 은영로(지수 분)가 재회해 펼치는 황혼의 로맨스쯤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혹한 시대를 동일한 배경으로 둔 채, 일부 인물간에 일어나는 반전으로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시청자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인가.
1회에 그려진 안기부 요원들의 전사는 캐릭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몰입을 돕기 위한 장치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로 인해 안기부 미화 논란이 일어났지만 JTBC는 이 역시 '오해'라며 향후 해소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전개된 분량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설강화'는 등장인물 설정에서 이미 오류를 품고 있다는 점이 질타를 받고 있다. 천영초, 윤이상, 임종석 등 실제 여러 국가권력의 피해자를 떠올리게 해 문제로 지적된 바. '오해'와 '반전' 타령이 어불성설인 까닭이다. 시대에 발 붙인 캐릭터들의 설정과 히스토리가 유사하다는 의혹이 나온 상황에서 뭘 더 보라는 것인가.
논란을 '오해'쯤으로 치부하고 가볍게 여긴 것은 이번 논란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를 드러낸 것이다.
JTBC는 역사왜곡에 관한 사과 대신 창작의 자유를 언급했다. "JTBC가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콘텐츠 창작의 자유와 제작 독립성"이라는 것.
진정한 '창작의 자유'란 피해자 없이, 아무런 왜곡 없이 창작자로서 책임이 밑바탕 됐을 때 보장되는 것이다. 방송 주체로 드라마를 선보이는 책임감 보다 창작의 자유를 우선에 둔다는 말인가. 그게 어떤 이야기이든, 무엇이든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고민이 부족한 창작물은 또 다른 형태의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사단법인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이하 박종철기념사업회) 측은 "애초에 민주화운동, 안기부와 간첩을 엮어서는 안 된다. 실제 군부 독재 시절 많은 피해자들이 간첩 조작 사건으로 폭력과 고문을 당해 삶이 망가지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고 '설강화'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이어 "당시 안기부를 포함한 국가기관들 논리가 '너희는 간첩이니까'였다. 드라마 속 진짜 간첩을 쫓는 안기부, 간첩을 운동권인 줄 알고 숨겨주는 여대생들 자체가 그들의 주장에 합리성과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건 또 다른 가해"라고 지탄했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