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과 불법 사이...'혁신의 그늘'

이름·아이디어 유사한 경우에 속앓는 창업가들
명확한 판단 기준 없어 잘못 가리기도 힘들어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에 기대…인식 개선도 필요

[아시아경제 이민우 기자] 국내 스타트업 이지식스는 모빌리티 분야에서 잔뼈가 굵다. 2015년 홍콩과 중국 심천 간의 이동을 지원하는 차량 예약 애플리케이션(앱) '이지웨이'를 내놓은 이후 2017년에는 '이지식스'로 이름을 바꾸고 인도네시아, 대만 등으로 진출했다. 싱가포르에 자회사 엠블을 세운 뒤에는 지난해 7월부터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를 시작했다. 그랩이나 우버 등 글로벌 강자들이 버틴 시장이었지만 블록체인 기반에 수수료 0%를 내세워 급성장했다. 현재는 누적 회원수 30만명, 싱가포르에만 운전자 2만5000여명을 확보했다. 작년 12월에는 캄보디아, 올해 1월에는 베트남에도 진출했다. 우경식 엠블 대표는 4일 본지와 통화에서 "블록체인을 통해 기사 수수료를 낮추고 간편결제 업체와의 협업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며 "향후 한국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서비스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타다'라는 서비스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같은 이름의 서비스를 이재웅 쏘카 대표가 지난해 10월부터 내놨기 때문이다. 우 대표는 "지난해 처음 타다를 출시할 당시 국내에서는 상표권을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진출할 때는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타다 서비스를 먼저 시작해놓고도 정작 우리나라에 진출할 때는 다른 이름을 써야 하는 상황에 대해 벤처 업계에서는 "타다라는 서비스 명칭이 먼저 사용된 것을 쏘카가 몰랐겠느냐" 등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다. 쏘카 관계자는 "전혀 무관한 서비스"라고 일축했다.

◆핵심 서비스 도용에 빛바랜 혁신=서비스 명칭이 겹친 것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벤처 업계에서는 핵심 아이디어나 서비스 자체를 도용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중소 승차공유(카풀)업체 대표 A씨는 모빌리티 스타트업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카풀이 요금을 받는 것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이라며 연일 택시업계가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A씨는 "친절한 기사님을 만날 때 커피 한 잔이라도 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특정 요금체계를 두지 않는 대신 이용자가 재량껏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냈다"며 "단순히 돈 뿐만이 아니라 커피, 음식 등 기프티콘까지 주고받는 모델까지 구상해뒀다"고 설명했다.

A씨는 투자사들과 만난 비공개 투자설명회에서만 이 아이디어를 공개했다. 하지만 불과 한달 뒤 경쟁업체에서 같은 서비스를 내놓았다는 것이 A씨의 주장이다. A씨는 "나름대로 비장의 한 수라고 생각한 부분이 바로 등장하자 무척 허탈했다"며 "사람의 생각이 비슷하다지만 이 분야의 인맥과 학맥이 좁은 것을 생각하면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허탈해했다.

◆불법과 합법사이의 모호한 도용=물론 반론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물이 비슷하다거나 같은 목적의 창업을 준비하다보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혁신의 도용'을 구분할 기준이 없는 것도 문제다. 스타트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박모씨는 "우버나 에어비앤비가 등장한 이후 기본 개념은 같지만 각국의 실정에 맞게 현지화한 여러 경쟁 서비스가 등장한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드물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 업계에서 억울하고 아쉽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아직까지 저작권과 상표권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학연'이라는 이름의 구태가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핀테크 분야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B씨는 "스타트업의 투자를 결정하는 펀드 심사자들이 일부 학교 출신들로 채워졌다"면서 "그런 네트워크끼리 서로 내밀한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있는 도용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 도용 차단할까=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지난해 12월 통과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에 거는 기대가 크다. 개정안은 특허와 영업비밀을 더욱 강하게 보호하는 것이 골자다. 기존에는 핵심 사업 모델 등 아이디어가 '영업비밀'로 인정받기 위해선 비밀 유지를 위해 '합리적 노력'을 들였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자금 여력이 충분치 않은 초기 스타트업은 정보 접근 차단 등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개정안은 이 같은 부담을 덜어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국내 최대 스타트업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관계자는 "개정된 법이 아이디어 도용을 막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혁신을 부르짖는 스타트 업계가 아이디어 도용을 부끄럽게 여기는 인식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민우 기자 letzwi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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